[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0>전 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7년 전 훌쩍 퇴사해 이름 내건 책방 연 사연
“그들은 날 ‘미스 최’라 불렀지만, 지지 않았다”
광고 카피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을 15일 서울 강남구 선릉 근처의 ‘최인아책방’에서 만났다. 오는 8월이면 이 책방을 연 지 3년이 된다. 류효진 기자

‘최인아’는 어떤 상징이었다.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는 여자’라는. 태어나면서부터 여성 대통령만 본 북유럽 정치선진국의 어느 사내아이가 “엄마, 남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는 일화처럼. ‘최초’를 몰고 다닌 최인아(58) 전 제일기획 부사장은 후배 여성 세대에게 실재하는 희망이었다. ‘터지는 광고 카피’ 뒤에는 그녀가 있었고 그 실력이 그를 삼성그룹 최초의 공채 출신 여성 부사장으로 만들었다.

제일기획 입사 25년 만에 이 화려한 수식을 얻었지만, 그녀의 처음은 “미스 최”였다.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그녀가 해야 하는 업무 중 하나는 책상 청소와 보리차 끓이기. 남자 동기보다 월급이 더 적을 뿐 아니라 진급 연차도 3년이나 차이 났다. 하기는 “여자는 어차피 안 뽑으니 원서를 가져갈 필요도 없다”고 하던 시절이었다니.

그녀는 현실에 지지 않았다. “제가 출근하면 뭐 한 줄 아세요? 주전자 들고 가서 보리차 끓여 팀에 가져다 놓고, 선배들 책상을 닦아놓습니다. 그래서 1시간 일찍 출근해요. 걸레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이면, 제작회의에서 의견을 다툴 때 상대 머릿속에 걸레 든 제가 연상될 것 같아서. 입사할 때 남자 이상의 능력이 있다고 해서 뽑아 놓고는 호봉을 남자는 3급, 여자는 4급을 줍니다.”

8개월 차 신입사원은 사장 면전에서 설득에 성공했다. ‘혁명을 할 게 아니라면, 현실을 돌파한 샘플이 되어보자’는 영리한 오기이자 끈기 덕분이었다. “자기를 들여다 보는 게 출발지예요. 견딜 건가, 바꿀 건가. 나한테 뭐가 중요한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그 질문이 먼저 있어야 답을 찾을 수 있어요.”

입사 다섯 달도 안돼 선배에게 “카피라이터는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 하는 게 어때”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만 둘 건가, 남을 건가 생각했죠. 그런데 대안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남아서 당신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리라 어금니를 깨물었죠.”

그녀의 히트작도 본질을 파고 드는 그 질문 덕에 나온 것들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 ‘일하는 여성’을 앞세운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베스띠벨리), 화장품을 왜 슈퍼에서 파는지를 다섯 글자로 표현한 ‘피부필수품 식물나라’(식물나라), 자유의 고정관념을 뒤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안 할 자유’(클럽메드)가 그렇다. 그녀의 카피가 별 거 없는 것 같은데도 새롭게 다가왔던 이유다.

부사장에 오른 지 3년 만에 미련 없이 퇴사했고, 지금은 “생각의 숲을 이루는” 책방 주인으로 산다.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생각을 꺼내놓고 얘기하고 토론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죠.” ‘우리는 왜 책을 읽나’, ‘책방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하고 답을 찾은 결과다. 서울 선릉로에 자리한 ‘최인아책방’은 그녀가 생각한 책방의 본질을 구현한 곳이다.

제일기획을 그만 두니 정당 두 곳에서 영입 제안을 했다는데, 하마터면 그녀를 책방이 아닌 여의도에서 볼 뻔했다.

◇20대여, 영원하라
입사한 지 18년 만인 2002년 그녀는 제일기획이 광고의 대가에게 주는 ‘마스터’의 첫 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초년병 시절은 입사 첫 해 선배에게 “그만 두는 게 낫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험난했다. 류효진 기자
-이름을 내건 책방은 거의 보지 못했어요. 이름이 브랜드가 되기 쉽지 않은데 대단해요.

“동업자의 의견이었어요. 처음부터 서점이 아니라 책방이라는 건 명확했는데 이름을 뭘로 할지 논의하다가 ‘이름을 겁시다’ 이렇게 된 거죠. 저는 ‘선배의 책방’이란 아이디어를 밀었어요. 그런데 우리보다 더 선배들이 있는데 자칫 오만하게 보일 수 있다는 의견에 접었죠. 어차피 책방을 열면 ‘아무개가 하는 거래’라는 얘기가 나올 거고, 또 마케팅을 생각해도 지명도가 우리에게는 자산이니 이걸 활용하자는 게 동업자 의견이었어요. 저도 ‘그러자’ 했죠. 책방으로 전화가 오면 우리 알바생들은 ‘네, 최인아책방입니다’라면서 받는데, 저는 그냥 ‘네, 책방입니다’ 해요. (웃음)”

-늘 이름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그럴 거예요.

“사실 최초라는 건 앞에 하나도 없었고 언젠가는 나오게 된다는 뜻이잖아요. 때가 무르익었을 즈음에 제가 있었던 거죠. 다만, 제가 잘한 거는 그러기까지, 여자라서 불리하고 열악했던 시절에 지지 않았다는 거죠.”

-카피라이터는 어떻게 된 건가요? 장래 희망이었나요?

“그럴 리가! (미소)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모르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어릴 때부터 저는 늘 헷갈릴 때 ‘나한테 중요한 건 뭐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건 뭐지’라고 먼저 생각하곤 했어요. 사람이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잖아요. 그럴 때 내 안쪽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 길었던 거죠.”

-어릴 때부터요?

“최초의 자각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 많이 받잖아요. 반 여자애들 절반이 현모양처가 꿈이었죠. 그런데 저는 ‘흥, 무슨 현모양처?’ 했어요.”

순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읽었나 보다. 그녀는 “우리 땐 그랬다니까요”라며 웃었다.

“집에서 살림하고 사는 게 아니라 일을 하며 살 것 같았죠. 말을 하거나 내 생각을 글로 쓰거나. 그래서 꿈이 소설가였다가, 기자였다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핵심은 모두 내 생각을 글이나 말로 전하는 일이었죠. 대학 전공도 ‘다 영문과 가라’고 하던 시절에, 저는 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갔죠.”

-그 시기에 카피라이터는 생소한 직업이었을 것 같아요.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거예요. 대학 1학년 때 우리 학교는 원고지 70매짜리(1만4,000자 분량) 논문을 쓰게 했거든요. 친구한테 주제를 뭘로 할 거냐고 물으니까 광고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랬죠. ‘무슨 광고 따위를 논문으로 써?’ 하하. 한 치 앞도 모르고요. 저는 조선이 일본에 비해 왜 근대화가 늦었는지를 주제로 썼죠.”

-1984년에 입사했죠. 제일기획은 어떻게 지원하게 된 건가요?

“(카피라이터가 뭔지) 모르고 들어갔어요. 사실 4학년 때 기자 시험을 계속 봤는데 안됐어요. 취업은 해야겠는데. 지금 이런 말 하면 이해가 안 될 텐데, 그때는 여자는 입사원서도 안 주던 시절이에요. 자격요건에 아예 ‘대졸남자’라고 박는 거죠. 여자를 뽑는다고 해서 원서 받으러 가면 ‘어차피 안 뽑으니 여자한텐 안 줘요’라고 하고요. 근데 신문에 제일기획 공채 공고가 나서 보니까 여자도 뽑고 전공불문이래요. 카피라이터가 뭔지도 몰랐는데 끝에 라이터(writer)가 붙는 걸 봐서 하여튼 뭔가 쓰는 일인가보다 하고 지원했는데 붙었죠. 입사하고 나서도 사실 1년만 다녀야지 했어요.”

이른바 ‘언론고시’에 미련이 남아서였다. 그러나 입사하던 해 가을 다시 기자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생각을 접었다.

“이거 주경야독으로 될 일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또 엄혹한 전두환 정권 시절에 내 생각을 용기 있게 기사로 쓸 자신이 없었죠. 제일기획에서 일한 게 29년인데 그 중 절반은 늘 한쪽 발만 담그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의외인데, 왜 그랬나요?

“내 아이디어로 뭔가 이야기를 해서 설득하고 반응을 얻는 과정은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이지, 이 세상을 어떻게 이롭게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있었죠. 바쁠 때는 잊다가 뭔가 내놓은 게(카피가) 신통치 않으면 또 그 고민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러다가 16년 정도 지나고 나서 문득 ‘이게 이번 생에 나의 일이구나’ 알아지는 순간이 오더군요.”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최인아책방’은 그가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며 축적한 노하우가 집약돼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때는 이런 책을 읽으라고 만든 ‘추천서가’다. 류효진 기자
-처음부터 광고 카피를 잘 쓰지는 않았겠죠.

“야단 많이 맞았죠. 심지어 입사해서 네댓 달 됐을 때 하루는 사수인 선배가 부르더니 ‘몇 달 너를 보니 카피라이터로서 재능이 없어 보인다. 고생하지 말고 접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요. 토요일이었는데 약속을 다 취소하고 울면서 집에 걸어가면서 사람 잘못 봤다는 걸 알게 해주겠다고 생각했죠.”

-마음 먹은 대로 됐나요?

“쉽지 않았죠. 하지만 자존심이 상했고 오기가 났어요. 지고 싶지 않아서 그 때부터 집에서 책상에 엎드려서 잤죠.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 내일까지 못 내면 어떡하나 싶고, 누웠다가 자버릴까 봐 못 눕는 거예요. 하하. 그런 시절을 오래 보냈죠.”

-얼마나요?

“2년 뒤에 작지만 신문광고에 카피라이터로 제 이름이 처음 나갔어요. 시계 광고였죠. 그 뒤에 확 터진 게 베스띠벨리의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카피예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요?

“젠더 문제와 연결이 돼요. 입사해서 보니 여자와 남자 처우가 다르더라고요. 생각했죠. ‘이거 가만히 있을 거냐. 아니다.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거지’ 싶었어요. 그러던 차에 입사 8개월쯤 됐을 때 새로운 사장이 왔죠. 그래서 팀별로 간담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얘기를 했어요. 팀장이나 선배들 얼굴이 ‘쟤 뭐냐’ 하는 표정이었죠. 그런데 사장이 듣더니 의견을 받아들이더라고요. 다만 시스템을 고치는 건 오래 걸리는 일이니, 월급부터 동등하게 고치자고 해서 보전을 해줬죠.”

-회사에서 유명해졌겠네요.

“그때 ‘샘플론’을 생각했어요. 아직도 입사하고 나서 대학 사은회에 가서 제가 한 말이 생각 나요. 일어나서 한 마디 하라고 하기에 이렇게 얘기했죠. ‘회사에서 나를 ‘미스 최’라고 부른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름 석자를 다 기억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어가니 나를 그냥 미스 최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나를 ‘최인아’라고 불러달라고 하지 않는다. 여성학에서 배운 대로 하면 싸워야 하는데 나는 소수민족이라 내가 함께 일하는 남자들을 적으로 돌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선 그들이 나를 인정하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 그 에너지를 모아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일종의 샘플론이었죠. 실제 그렇게 됐고요.”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경험에서 나온 거군요.

“그렇게 부당하다는 걸 사회에 나와서 알았어요. 그 시스템을 바꾸려면 내가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베스띠벨리라는 옷 브랜드 광고를 맡게 됐어요. 타깃이 나 같은 사람들이었죠. 그 때는 일하는 여성을 ‘오피스 레이디’라고 해서 OL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을 공감시켜야 했어요. 그럼 내가 겪은 일로 카피를 만들자고 생각했죠. 팀장은 처음에 ‘프로? 어려워, 안돼’ 했어요. 그래도 광고주한테 다른 아이디어와 함께 제안해 달라고 했죠. 그런데 덜컥 된 거예요. 그리고 그야말로 대박이 났어요. 그 얘기인즉 저같이 응어리졌던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공감을 끌어냈다는 거죠.”

-그 이후로 회사 내에서도 입지가 달라졌겠네요.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할 기회가 늘었죠.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컨트롤하면서 진행하고 또 그게 (잘) 되면, 정말 신이 났죠. 그래서 일에 빠져서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재미 있는 게 곧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건 아니니까 고민은 계속 됐죠.”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그녀는 평생 생각하는 법을 훈련해왔다. 광고도 결국 기업이나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를 생각의 힘으로 돌파해 해법을 찾는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류효진 기자
-광고 카피는 어떻게 나오나요?

“죽어라 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하. 아이디어는 질문, 인사이트, 솔루션에서 오죠. 과제를 받아서 질문하고 인사이트를 찾기 시작하면 늦어요. 늘 내 머릿속에 몇 질문들은 돌아가고 있어야 하죠. ‘BTS(방탄소년단)가 그렇게 인기라는데 이게 의미하는 건 뭘까’, ‘사람들은 BTS의 무엇에 꽂힌 걸까’,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거지’ 하는 질문을 평소에 하는 거죠. ‘쟁이’들이라고 어떻게 맨날 새로운 걸 내놓겠어요. 제가 알아차린 건 새롭다는 건 본질에 다가가면 갈수록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안쪽으로 깊이 파는 편이었어요. 제가 낸 카피의 표현이 대단히 기발하냐 하면 그런 건 거의 없죠.”

그 중 하나로 그녀가 예를 든 게 ‘식물나라’ 화장품 카피였다.

“제일제당(현 CJ)이 식품사업을 주로 하다 새 비즈니스로 화장품을 시작할 때였어요. 해외에서는 이미 드럭스토어에서 화장품을 팔 때라 슈퍼에 내놨죠. 그런데 1차 론칭 때 실패했어요. 안 팔리는 거죠. 그래서 다시 광고를 시작할 때 내가 맡게 됐죠. 그 때 ‘피부필수품’이라는 카피를 썼어요. 슈퍼라는 데는 어떤 곳인가. 필수품을 사는 데다. 그럼 여자들에게 화장품이란 건 뭔가. 통념은 사치품이지만 사실 필수품이다. 나만 해도 피부가 건성이라 세수하고 나서 바로 스킨을 바르지 않으면 엄청 당긴다. 이렇게 생각해서 피부필수품이라고 붙인 거죠. ‘화장품을 왜 슈퍼에서 사?’라는 인식을 깨야 했던 거예요.”

-이런 얘기를 책으로 쓰면 재미있을 거 같아요.

“쓰고 있어요. (미소) 가칭 ‘당신이 브랜드다’라는 제목으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나 관점을 가지는 게 좋은가 하는 내용이죠. 광고 얘기들도 들어갈 거예요.”

-그런 성공 카피들을 쓰면서 결국 능력을 인정 받았고 임원 자리에까지 올랐죠. 여자 후배들에게는 롤모델이었을 테고요. 임원이 되니 뭐가 달라지던가요.

“규정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 많이 바뀌었지만, 사실 사람 머릿속의 생각이 쉽게 없어지겠어요? 그러니 부단히 부딪히는 거죠. 성과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가면서 내 말에 실리는 무게가 달라졌죠. 조직을 관리하는 자리에 갔을 때는 일부러 ‘여자, 여자’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 태도가 되레 여자 후배들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대신 룰을 공평하게 집행하려고 노력했어요.”

-조직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다행히 내게는 분별력이란 게 있어요. 나 자신에게 취하지 않았죠. 예를 들면 ‘내가 남자였더라도 임원을 시켰을까’ 생각해 보는 거예요. 과거에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았던 것처럼, 내가 남자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 여자를 임원 시키는 게 회사 홍보 효과도 있으니 시킨 건 아닌가 하는. 돌이켜 보면 내 전체 커리어 중에 절반은 여자라서 불리했던 반면 뒤의 절반은 여자라서 유리했다고 정리했어요. 아마 내가 10년, 20년 전에 태어났다면 더 능력이 뛰어났어도 이런 영예는 얻지 못했을 거예요. 사회적인 여건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니까. 그런 운도 저한텐 따랐던 거죠. 또 무르익기 전에 포기했다면 기회가 안 왔을 테고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아무것도 안 할 자유
그녀는 “‘1호’ 혹은 ‘최초’의 의미는 결국 다음 세대에게 ‘여보시오, 여기에도 길이 있소’라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효진 기자
-슬럼프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대처했나요?

“일단 멈춰요. 그리고 다시 봐요. 일하면서 멈췄던 적이 두 번 있어요. 첫째는 8년차 무렵이었죠. 두 달 휴직을 했어요. 몸이 많이 망가져서 그만둬야겠다고 했더니 두 달 쉬다 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고비가 40대 중반에 다시 오더라고요. 여자라는 봉우리를 넘었더니 이제 나이라는 봉우리가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는 점점 드는데 새 아이디어를 낼 수 있을까. 어느날 나를 보니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눈동자가 풀려 있더라고요. 그래도 또 그만 둔다고 하니 1년 휴직 제안을 회사에서 하더군요. 그래서 그 때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갔어요.”

35일간 800㎞를 걸었다. 종이컵 바닥만한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그게 굳은 살이 되기를 반복하면서 그녀는 깨달았다. ‘내가 나이 드는 일도 잘하고 싶었던 거구나.’ 새삼스럽게 아직도 일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받은 열매를 후배들에게 다 돌려주고 그만 두기로 하고 회사로 돌아왔죠. 그 때 ‘생각은 온 몸으로 하는 거구나’ 깨달았어요.”

그리고 6년 뒤인 2012년 12월 진짜 사직했다.

“평소 조직의 비극은 자리가 요하는 역량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역량이 일치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시 나를 그렇게 진단한 거죠. 이 디지털 물결이라는 변화의 시대에 광고회사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답을 찾는 일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니까요.”

-할 일을 생각해두고 그만둔 건가요?

“원래 은퇴한 뒤에 공부를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서양사학을 배우려고 대학원에도 들어갔죠. 그런데 2년쯤 되니까 일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더라고요. 정말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죠.”

그를 비롯해 세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광고기획 계통의 일을 한 세 사람이 함께 일을 한다니까 프로젝트가 들어왔어요. 그게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였죠. 아이디어를 내다가 누군가, 아마 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거 우리가 직접 하죠’ 했는데, 다들 놀랍게도 그러자고 한 거예요. 책을 다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그런데 어쩌다 보니 (공동대표인) 정치헌씨와 저를 연결해준 사람은 빠지고 둘이서 동업을 하게 됐어요.”

2016년 8월 선릉로에 자리한 유럽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건물에 ‘최인아책방’이 들어섰다.

-어떤 책방인가요?

“그저 책을 사고 파는 서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생각을 꺼내놓고 얘기하는 책방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생각의 숲을 이루다’라는 문구로 책방 소개말을 쓴 거예요. 우리 책방에는 책을 중심으로 생각을 자극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죠.”

저자 강연, 책방 콘서트, 마음상담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책방에 와서 사람들이 책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을 바꿔서 고민해봤죠. ‘책을 읽는다는 건 뭘까. 언제 사람들은 책을 찾을까’로.”

그래서 ‘최인아책방’에는 이런 서가가 있다. ‘불안한 이십 대 시절, 용기와 인사이트를 준 책’, ‘서른 넘어 사춘기를 겪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고민이 깊어지는 마흔 살들에게’,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 고민할 때’, ‘스트레스, 무기력, 번 아웃이라 느낄 때’…

책방주인들의 믿을만한 친구, 선후배가 꼽은 ‘추천서가’를 만든 거다. 추천인의 이름, 직업과 함께 직접 적은 추천 이유도 적혀있다.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는데 회원이 얼마나 되나요.

“570명 정도예요. 책방을 연 지 1년 반쯤 됐을 때 시작했죠. 한 달에 한 권 직접 제가 추천 이유를 쓴 편지와 함께 책을 회원들에게 보내요. 무슨 책이 올지 회원들은 알 수 없죠. 그러니 책방에 신뢰가 없으면 가입하기 쉽지 않아요. 책과 독자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생각했죠. 그런 뒤 독자와 생산자가 한자리에 앉아서 얘기 나누는 시간을 마련해요.”

◇자꾸자꾸 당신의 향기가 좋아집니다
그녀는 일을 하며 늘 재미와 의미를 찾았다. 그녀는 “내 두 번째 커리어인 책방은 보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효진 기자
-결혼은 일 때문에 안 한 건가요?

“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났죠. 가끔씩 내 편, 내 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과연 결혼 생활을 하기에 적절한 인간인가 하는 의문도 있었고요.”

-살면서 어떤 때 행복한가요?

“그게… 참 뜻밖입디다. 나는 대단히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를 기쁘게 할 때 행복하다는 걸 알았어요. 회사에서 임원으로 조직관리를 하던 때도 후배들의 고민을 해결해줘서 그들의 얼굴이 밝아지면 기쁘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쓰이고 있구나 깨닫게 돼서. 요즘도 책방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와서 사람들이 이런 걸 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면 내가 하는 일이 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죠. 사람들 마음에 뭔가 차오르게 할 때 기쁘고 행복해요.”

-혹시 정치 권유 받아본 적 있나요?

“있어요. 두 군데서요. 부사장 그만둔 뒤에요. 그런데 거절했죠.”

-단칼에요?

“네. 정치라는 건 제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잘 할 거 같지도 않았고, 잘 쓰일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어요.”

그의 말대로 평생 내면에 안테나를 세우고 살았기 때문에 빠른 판단이 가능했을 거다.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뭔가요?

“사람이 이런 저런 유혹에 흔들릴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저를 돌아보고 다독이는 말이 있어요. ‘돈보다 내가 중요해.’ 괜찮은 인간이고자 하는 욕망이 저한테 있는 거죠. ‘이거 하면 안 하는 거보다 돈은 좀더 생기겠지만 그거보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해, 그렇지 않아?’ 하는 질문을 한 번 쓱 해보는 거죠.”

그녀가 걸어온 길이 숲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의 결과물로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어린 나무를 키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바람에 꽃눈이 졌다면 최인아라는 숲은 없었을 거다. 고요하고 옹골진 숲에 다녀왔다.

‘최인아책방’은 강남의 여느 건물 같지 않게, 유럽의 오래된 집을 연상시킨다. 입구는 마치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같고, 복층 구조인 내부의 바닥이나 문은 나무로 돼있어 삐걱삐걱 예스러운 소리가 난다. 김지은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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