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료사진

두 목장이 있다. 한쪽은 가두리 형태다. 기후가 일정하고 꾸준히 목초를 관리해줘 천재지변이 아닌 한, 탈 날 일은 없다. 대신 가축들의 움직임이 적다. 긴장감 없이 지내다 보니 자라는 속도도 변변찮다. 다 자라도 높은 값을 받긴 어렵다.

다른 목장은 개방형이다. 광활한 지역에 풀어 키운다. 한때 비옥했다 해도 안심하면 안 된다. 금세 풀이 마르고, 종종 맹수도 만날 수 있다. 목동들이 환경을 살펴 서식지를 옮겨줘야 한다. 대신 가축들의 야성이 살아있다. 식욕도, 활동량도 월등하다. 우람한 몸집에 탄탄한 근육까지, 살아 남기만 하면 나중에 훨씬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1.01%에 불과했던 작년 퇴직연금 수익률을 보며 문득 우리 직장인들의 ‘연금 목장’이 떠올랐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노후 자금을 위한 송아지, 망아지 한 마리씩은 키우게 된다. 저마다 자신의 새끼가 황소, 종마로 자라나길 꿈꾸지만 현실은 대개 어긋난다.

왜일까. 우선 한국인은 대부분 가두리 목장을 택한다. 연금으로 치면 받을 돈을 미리 정해둔 이른바 확정급여(DB)형이다. 예금, 채권 같은 원리금보장상품에 맡겨 둔 자산 비중이 90%다. 소, 말들이 죽을 일도 없지만, 성장에 좀체 탄력이 붙지 않는다. 한국 경제는 예적금 금리가 10, 20%를 넘나들던 고도성장기를 지난 지 오래다.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가두리 목장을 선택하는 순간, 쑥쑥 자라는 노후 자산은 포기했다는 의미가 된다.

개방형 목장을 택하는 데는 물론 위험이 따른다. 소, 말들이 쑥쑥 클 수도 있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치거나 잃을 각오도 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작년 말 기준 공격적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이른바 확정기여(DC)형 연금을 든 비중은 4명 중 1명(작년말 기준 26.9%)꼴,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운용되는 자산은 10%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 개방형 목장을 택하고도 대부분의 주인은 가축들의 상황에 무심하다. 지난해 DC형 연금 가입자의 91.4%(약 42조원)는 목동에게 서식지 바꾸기(운용 상품 변경)를 지시하지 않았다. 날씨 좋아 보이는 곳에 가축을 한번 풀어놓고는, 그 지역이 사막이 되든 맹수에 점령당하든 쳐다보지 않는 셈이다.

재미를 보는 건, 매달 관리비를 받아가는 목동(금융회사)뿐이다. 이들은 지난해 가축들이 1.01%(수익률) 자라는 동안, 절반에 가까운 0.47%를 관리비(수수료)로 떼 갔다. 해마다 소, 말의 숫자는 급증하는데(작년 말 현재 190조원) 그들은 굳이 열심히 키울 생각이 없다. 잘 키우면 칭찬이야 받겠지만, 괜히 모험에 나섰다가 한 두 마리 사고라도 나면 책임을 뒤집어 쓸까 두렵다. 나서지 않아도 관리비는 꼬박꼬박 들어온다. 소, 말을 맡겨달라는 영업엔 열심이지만 한번 맡긴 소, 말은 잘 옮기지 않으니 대충 방치해도 그만이다.

2050년대엔 국민연금이 고갈된다며 난리지만, 그를 보완할 우리의 개인연금 목축 현실이 이 모양이다. 저마다 노후 걱정은 태산인데 자산은 이토록 방치하고 있다.

본업이 목축이 아니라 해도 소, 말 한 마리씩 가진 주인이라면 기본적인 목축 상식은 갖고 있어야 한다. 애초 어느 목장에 맡기는 게 내게 맞을 지, 기후는 어떻게 변할 지, 어떤 목초지가 내 가축에게 적당할 지 최소한은 알아야 한다.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가두리 목장에 맡기고, 개방형 목장을 택하고도 나몰라라 지내면서 목장, 목동이 시원찮다고 한탄하는 건 어딘가 억지스럽지 않은가.

금융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지 벌써 오래다. 노후 불안이 국가 경제 전체를 발목 잡고 있는 현실에서, 공교육에 기초 자산관리에 대한 교과 과정조차 없는 건 모순이다. 알아서 잘 크는 가축은 없다.

김용식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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