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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염색, 할까요 말까요?

입력
2019.04.17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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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오늘도 후회했다. 이마의 주름에 비해 머리가 너무 까맣게 보였다. 왠지 나 같지 않다. 샴푸로 머리를 빡빡 문질렀다. 아내는 그런 내가 이해가 안 되나 보다. “한결 보기 좋아졌는데 왜 그래요?” 난 짐짓 “그래?”라고 했지만, ‘휴, 다음에는 내가 어디 다시 염색을 하나 봐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60이 넘고 머리가 반쯤 센 나는 아직도 머리색에 관한 한 지조가 없다. 주변의 의견마저 엇갈린다. 동네 단골 미용실 원장님은 보기 좋은데 왜 굳이 염색을 하냐고 하지만, 아내는 늘 염색을 권한다. 미용실에서 돈 들여 염색하는 건 아니다. 머리를 깎고 와서 욕실 거울 앞에서 내 손으로 염색을 한다.

이분도 같은 고민을 했나 보다. 그분은 나이가 예순인 국회의원인데 얼마 전 페이스북에 흰머리가 제법 난 사진을 올리고 “염색을 안 하고 버틸까 하는데 페친님들 생각은요?”라고 물었다. 댓글이 100개쯤 붙었는데 염색을 하라는 의견이 8대 2 정도로 많았다. 난 내심 놀랐다. 그 의원님은 다음날 민심에 따랐다며 염색한 사진을 올렸는데 ‘좋아요’가 압도적이었다.

중년에 접어들어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갈등한다. 동창 모임에 가면 천차만별이다. 백발거사 옆에 까만 머리가 앉아 있다. 외모만으로도 열 살 이상 차이 나 보인다.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염색이 화제에 오르면 의견은 갈린다. 결국 논쟁의 포인트는 이거다. 젊어 보이는 게 좋은가, 아니면 원숙해 보이는 게 멋진가.

나는 갑자기 흰머리가 많아지면서, 이제 나도 연륜이 돋보이겠구나 싶어 내심 싫지 않았다. 남성의 은발 하면 작고한 신성일, 여성은 패티 김이다. 두 사람 다 얼마나 멋진가. 나도 은발에 청바지, 하얀 운동화를 꿈꿨다. 은발로 더 매력적인 외국 배우도 많다. 폴 뉴먼도 그랬고 청춘 스타였던 브래드 피트나 리처드 기어는 어떤가. 조지 클루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도 중년 남자의 은발에 유혹당한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오죽했으면 ‘조지 클루니씨, 우리 엄마랑 결혼해 줘요’란 제목의 책(저자 수진 닐슨)까지 있을까. 65세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 달 전 열린 전인대에 염색하지 않고 등장한 게 뉴스가 됐다. 친근한 이미지를 부각했느니, 자신감의 발로라니 하는 서구 언론의 의미 부여가 유별났다.

미디어는 이렇게 말한다. 중년 남성의 은발은 여유와 원숙, 기품과 지성, 그리고 섹시함을 어필한다고.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나는 문득 유심히 거울 속의 남자를 바라봤다. 흰머리가 무질서하게 삐죽삐죽 두피의 절반 이상 솟아나온, 추레하고 총기를 잃은 초로의 사내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거기에는 젊은 오빠도, 로맨스 그레이 파파도 없었다. 나는 신성일도, 리처드 기어도, 조지 클루니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될 수 없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쓸쓸한 어깨 뒤에서 그랬듯, 내 아들이 언제 내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려나. 아내 무릎베개의 다정하고 호사스런 정경도 욕심내지 않으련다. 그래서 그날로 나는 3,000원짜리 갈색 톤의 염색약을 사 거울 앞에 섰다. 다 칠하지 말고 조금은 흰머리를 남겨 살짝 희끗희끗하게 보여야 남의 눈을 헷갈리게 하는 데 유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받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 백발을 가지런히 빗질해 넘기고 검은 구두에 반짝반짝 광택을 낸 동창을 보면 마음이 또 흔들린다.

언제 이런 경지에 오를 것인가. 이백은 ‘장진주(將進酒)’에서 읊었다. “황하의 물결이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듯,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 저녁에 눈이 됐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인생의 뜻을 알았다면 즐길지니,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지 말지어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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