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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자원저주론’에 빠진 라틴아메리카

입력
2019.04.12 19: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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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남동부 마드레데디오스주에 위치한 불법 금광의 모습. 토양과 주위 환경이 완전히 파괴돼 있다. 마드레데디오스=로이터 연합뉴스
페루 남동부 마드레데디오스주에 위치한 불법 금광의 모습. 토양과 주위 환경이 완전히 파괴돼 있다. 마드레데디오스=로이터 연합뉴스

풍부한 자원의 대륙, 라틴아메리카는 역설적으로 그 풍요로움에 비례하는 자원 개발과 분배 과정에서의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을 겪어 왔다. 15~16세기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엘도라도(El Doradoㆍ황금이 넘쳐나는 전설의 이상향)’ 탐험은 그 자체가 자원 수탈의 역사였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역내 국가 간 분쟁으로도 이어졌다. 1879~1883년 칠레와 볼리비아, 페루 3개국이 볼리비아의 구아노와 초석 같은 중요 자원을 둘러싸고 4년에 걸쳐 벌인 ‘태평양 전쟁’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역사 교과서들은 이 같은 분쟁사를 끔찍한 자원전쟁으로 인식하면서 반성하고, 미래 반복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원의 저주’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라틴아메리카 자원개발 역사의 특징을 ‘경로 의존성’으로 해석한다. 식민지 시절 뿌리 내린 자원의존적인 경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과거의 생산 및 개발 방식, 불평등한 분배 방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다국적기업, 사들이고 쫓아냈고 암살했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네루다는 시를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 다국적 기업의 자원침탈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네루다는 시를 통해 미국의 제국주의, 다국적 기업의 자원침탈을 비판하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특히 자원개발에 선제적으로 진출한 유럽과 미국 등 해외투자자들과의 갈등이 도드라진다. 오랜 식민화 경험과 식민 유산은 늘 이 사회에서 커다란 갈등 이슈였고, 종종 경제민족주의로 이어졌다. 1950년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를 노래한 웅장한 서사시집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에서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자원수탈 역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남미 지역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 탄화수소 개발을 독점한 스탠다드 오일사(Standard Oil Co.)에 대해 네루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 국민, 해양, 경찰, 의회 그리고 심지어는 빈곤한 이들의 옥수수 밭조차도 사들였다. 시민을 의식화했고, 제복을 입혔으며, 형제들을 각각 적으로 만들었다. 기관총으로 무장해 정글에서 볼리비아인들을 쫒아냈고, 파라과이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한 방울의 석유를 위해 대통령을 암살하고, (중략) 저항하는 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새로운 감옥을 만들었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라틴아메리카 태생의 유일한 정치경제이론인 ‘종속이론’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쿠바 혁명(1959년), 칠레 아옌데 혁명(1970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1979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1994년) 등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5년 5월 볼리비아의 석유ㆍ가스 산업 국유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수도 라파스에서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자가 총기를 든 경찰에게 차이고 있다. 라파스=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2005년 5월 볼리비아의 석유ㆍ가스 산업 국유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수도 라파스에서 벌어진 가운데, 한 시위자가 총기를 든 경찰에게 차이고 있다. 라파스=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자원을 둘러싼 21세기판 분쟁은 여전하다. 대표적인 예로 ‘자원 저주론’의 상징격인 볼리비아를 꼽을 수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자원 분쟁은 1875년 남미 볼리비아의 동부 저지대 산타크루즈에서 대륙 최초로 석유자원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20세기 초반 미 석유회사들이 개발에 뛰어들면서 갈등은 본격화했고, 이후 내내 볼리비아의 탄화수소 산업은 국유화와 민영화를 반복하며 정치사회적 분쟁의 중심에 섰다.

볼리비아는 천연가스 매장량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많지만 역내 최빈국 중 하나다. 브라질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합작기업 렙솔, 프랑스의 토탈 등 해외 거대 다국적 석유회사들이 생산 이익의 82%를 독점해 온 탓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에보 모랄레스 정권이 출범, 에너지산업 국유화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하는 등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신은 풍부한 자원도, 부패한 정치인도 창조했다

2014년 브라질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 등의 뇌물공여 혐의 수사를 시작으로 막대한 규모의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2016년 8월 탄핵돼 자리에서 물러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브라질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 등의 뇌물공여 혐의 수사를 시작으로 막대한 규모의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2016년 8월 탄핵돼 자리에서 물러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자원 저주론’의 한 축이 식민지배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다른 한 축은 국내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자원 개발에 참여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책결정자들, 정치엘리트들은 근본적으로 자국이 소유한 자원 개발과 분배, 이용에서 지극히 ‘합리적 행위자’(?)였다. 모든 국민의 이익과 시민사회, 즉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엘리트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충실한 정책을 입안해 왔던 것이다.

이들의 경쟁적인 개발이익 추구 행태는 때로 정치적 부패로 나타났다. 그리고 원주민 공동체와 환경주의자, 중산층, 영세농민, 최근에는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 곳곳에서 집단적 저항에 직면했다. 한 예로 2015년 중남미 최대 기업인 브라질의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 등과 연루된 정치적 부패 스캔들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탄핵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5명 중 3명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는 등 심각한 국내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켰다.

2012년 3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 파괴와 수은 오염을 막기 위한 페루 정부의 ‘소규모 금광 개발 규제’에 반대하는 광부들이 페루 남동부 푸에르토말도나도 거리에서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 시위 과정에서 최소 3명이 경찰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푸에르토말도나도=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2년 3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 파괴와 수은 오염을 막기 위한 페루 정부의 ‘소규모 금광 개발 규제’에 반대하는 광부들이 페루 남동부 푸에르토말도나도 거리에서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이 시위 과정에서 최소 3명이 경찰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푸에르토말도나도=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1년 페루 카하마르카에서는 미국 금광업체 뉴몬트가 주도하는 48억달러(5조4,768억원) 규모의 광산개발 프로그램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폭력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광산 개발이 대기 및 수질 오염을 야기해 지역 주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밝혀지자 시민사회가 분노한 것이다. 시민 8명이 총격상을 입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경찰과의 충돌 수위가 높아지자 비상사태까지 선포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광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5%를 차지하고, 전체 수출에서는 60% 가까이 달하는 상황에서 광산 개발을 중단하기는 힘들다는 게 페루 정부의 입장이다.

◇세계 최초로 ‘금속 채굴 전면 금지’한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 시민들이 2017년 3월 29일 수도 산살바도르의 의사당 밖에서 광산 채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죽음을 뜻하는 해골 그림에 ‘광물’과 ‘금속’이라는 글씨가 함께 쓰여 있다. 산살바도르=AFP 연합뉴스
엘살바도르 시민들이 2017년 3월 29일 수도 산살바도르의 의사당 밖에서 광산 채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죽음을 뜻하는 해골 그림에 ‘광물’과 ‘금속’이라는 글씨가 함께 쓰여 있다. 산살바도르=AFP 연합뉴스

‘자원 저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자원이 오히려 갈등과 화를 불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라틴아메리카를 창조할 때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토지는 줬지만, 이를 관리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함께 창조했다’라는 지독한 농담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관리 방식이라는 얘기다.

자원 분쟁과 갈등의 해법은 결국 새로운 관리 방식, 새로운 자원개발 거버넌스의 필요성을 요한다. 자원의 공공재적 성격에 대한 인식 전환, 정부의 규제 능력 향상과 개혁, 지속가능발전 모델의 실천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비단 환경만의 문제도 아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자원 의존형 경제는 대외경제에 심각한 취약성을 노출시켜 왔다. 늘 국제시장의 자원 가격 변동에 취약하게 노출돼 경제가 롤러코스터를 탔던 것이다.

2017년 3월 29일 엘살바도르의 수녀들이 광산 채굴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이튿날 엘살바도르 의회는 세계 최초로 금속 채굴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17년 3월 29일 엘살바도르의 수녀들이 광산 채굴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이튿날 엘살바도르 의회는 세계 최초로 금속 채굴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오랜 자성 끝에 일각에서 변화의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 2010년 중미 코스타리카는 노천광산 자원개발 전면금지 법안을 발의했다. 2017년 엘살바도르는 국회 입법으로 “국가 영토 내에서 모든 광물 자원개발을 금한다”고 선언해 금광개발에 투자한 다국적 기업과의 각종 분쟁을 경험했으나,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 법안은 유지되고 있다. 콜롬비아의 일부 지방정부도 더 이상 지방의 광물자원 개발 허가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원 의존형 경제발전의 패턴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금지 법안을 제도화하는 건 결국, 천문학적 환경 피해에 대한 공동체 위기감의 반영일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자원개발 현장 곳곳에서 다시 ‘물이 금을 이기고’, 자연자원에 대한 ‘수탈과 자본축적’ 방식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하상섭 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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