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동연구진 첫 관측 성공… “우주의 신비 밝히는 시작점” 평가
행성뿐 아니라, 빛조차 먹어 치워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우주의 무법자’ 블랙홀이 드디어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블랙홀의 존재를 예측한 지 100여년 만에 인류 최초로 블랙홀을 관측한 것이다.
유럽남방천문대(ESO)는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EHT) 프로젝트’를 통해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처녀자리 은하 중심에 있는 초대형 블랙홀 ‘M87’을 관측하는데 성공했다”고 10일 밝혔다. 이 블랙홀의 질량은 태양의 65억배에 달한다. 블랙홀은 표면 중력이 엄청나게 큰 천체로, 블랙홀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탈출속도는 빛의 속도 보다 빨라야 한다. 그래서 빛 조차 블랙홀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해 항상 어둡게 보인다. ‘검은 구멍’이란 뜻의 영단어 블랙홀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HT프로젝트는 이렇게 어두운 블랙홀의 외부 경계면인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관측하기 위해 2012년 시작됐다. 모든 물질을 흡수하는 블랙홀은 직접 관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블랙홀 경계지역(사건의 지평선)을 중심으로 블랙홀의 모습을 보기로 한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은 사람이 지평선 너머의 물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블랙홀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측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블랙홀의 경계 지역’을 의미한다. 블랙홀의 강한 중력은 ‘사건의 지평선’ 바깥을 지나는 빛을 휘게 만드는데, 이 빛들을 관측하면 블랙홀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국제공동연구진은 이를 위해 미국ㆍ칠레ㆍ스페인ㆍ남극 등 전 세계에 곳곳에 있는 8개의 전파망원경을 연결, 구경이 지구만한 거대한 가상 망원경을 만들었다. 멀리 떨어져있는 전파망원경끼리 묶으면 더 먼 천체를 선명하게 관측할 수 있다. 블랙홀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파(파장이 긴 빛)를 같은 시각에 관찰해 해상도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론상 지상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전파망원경의 규모는 지구 크기이다. 이렇게 만든 거대한 가상 망원경으로 우리 은하계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블랙홀 ‘궁수자리A*(Sgr A*)’와 ‘M87’을 관찰해왔다. 이번 관측은 2017년 4월 5~14일 6개 대륙에서 8개 망원경이 M87에서 나오는 1.3㎜ 파장대 전파를 동시에 관측ㆍ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각 전파망원경이 관측한 영상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ㆍ독일 막스플랑크 전파천문학연구소의 슈퍼컴퓨터를 통해 최종 영상으로 변환됐다. 당초 이들은 2017년 4월쯤 첫 블랙홀 관측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남극에 있는 전파망원경(SPT)의 데이터 전달 문제로 2년 정도 늦춰졌다.
EHT에 참여 중인 8명의 한국인 과학자 중 한 명인 정태현 한국천문연구원 전파천문본부 선임연구원은 “EHT 망원경의 해상도는 파리의 카페에서 뉴욕에 있는 신문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며 “질량이 매우 크지만 우주에서 가장 작은 천체인 블랙홀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높은 해상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지구와 같은 질량의 블랙홀은 탁구공보다 지름이 작다. 천문연은 EHT 프로젝트에 참여한 200여명, 13개 기관 중 동아시아 국립천문학 연구기관연합인 동아시아천문대(EAO) 소속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그간 간접적으로 추정해 온 블랙홀의 존재를 인류가 관측을 통해 사상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점이다. 블랙홀은 빛을 먹어 치울 뿐 아니라, 반사시키지도 않아 관측이 어려웠다. 그간 과학자들은 X선ㆍ감마선 등 블랙홀이 내는 빛을 보고 블랙홀의 존재를 추측해왔다.
박일흥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그간 태양계에서만 증명됐던 상대성이론이 우주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라며 “블랙홀에서도 물질이나 빛이 빠져나올 수 있다고 주장해 물리학계에 충격을 준 스티븐 호킹 박사의 ‘호킹 복사’ 이론을 검증하는 등 지금껏 알 수 없었던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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