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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대 그 소품] 유태평양 “판소리 소리꾼에게 부채는 몸이다”

입력
2019.04.10 17:46
수정
2019.04.11 11:1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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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소리꾼의 부채

※ 공연 소품을 눈 여겨 본 적 있나요? ‘공연 무대에서 쓰이는 작은 도구’를 뜻하지만,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소품으로 공연을 읽어 보는 ‘그 무대 그 소품’이 격주 목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 옵니다.

판소리 무대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소리꾼의 부채다. 2016년 소리꾼 유태평양이 '흥보가' 완창 무대에서 들었던 부채에도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국립창극단 제공
판소리 무대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소리꾼의 부채다. 2016년 소리꾼 유태평양이 '흥보가' 완창 무대에서 들었던 부채에도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국립창극단 제공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어떻게 소리를 할 것인가’ 만큼 고심하는 게 있다. ‘어떤 부채를 들 것인가.’ 국악 신동에서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유태평양(27)도 다르지 않다. 그는 부채를 “소리꾼의 옷”이라고 했다. “부채는 소리꾼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2016년 유태평양의 ‘흥보가’ 완창 무대. 6세 때 처음 ‘흥보가’를 완창한 이후 약 20년 만이라 부채를 고르는 데 더 신중했다. 그는 사물놀이를 하는 모습이 흘림체 그림으로 담긴 부채를 택했다. “역동적인 그림체가 박을 탄 흥보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와 잘 맞을 것 같아서”였다. 부채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감전 사고로 잃은 두 팔을 잃어 의수로 그림을 그리는 석창우 화백이 유태평양에게 선물한 그림이 그려진 부채였다.

소리하는 창자(唱者)와 북을 치는 고수(鼓手)가 함께 오르는 판소리 무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 창자가 손에 쥔 부채다. 소리꾼에게 부채는 “상징”이다. 작품 내용을 상징하기도 하고, 소리꾼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도 한다. 그저 멋으로, 혹은 손이 허전해서 드는 소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소리꾼들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부채가 없으면 북채라도 쥐고 노래하는 훈련을 받는다. 부채는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춰 온몸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창자의 몸짓인 ‘발림’을 돋우는 소품이기 때문이다. 유태평양의 이야기. “판소리는 가만히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에요. 연기와 춤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장르예요. 어떻게 보면 부채는 제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부채가 제 몸으로 표현하기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극대화 시켜주니까요.”

창극 '심청가'는 거의 모든 소품을 부채로 표현했다. 도창자가 '범피중류'를 부르기 시작하면, 배우들이 부채로 파도를 만들어 '격랑이 휘몰아치는 인당수'를 표현한 부분.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심청가'는 거의 모든 소품을 부채로 표현했다. 도창자가 '범피중류'를 부르기 시작하면, 배우들이 부채로 파도를 만들어 '격랑이 휘몰아치는 인당수'를 표현한 부분. 국립창극단 제공

작품과 소리꾼에 따라 다르게 설정하지만, 판소리 다섯 마당에는 부채가 쓰이는 장면이 꼭 나온다. 판소리 속 부채는 부채 이상이다. ‘적벽가’에선 소리꾼이 부채가 활인 양 들고 쏘는 시늉을 하고, ‘흥보가’에서는 놀부가 흥부를 때리는 몽둥이로 부채를 쓴다. ‘춘향가’의 부채는 춘향과 몽룡의 사랑 편지가 되었다가 이몽룡의 마패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창극 ‘심청가’에서는 빨래 방망이, 뱃사공의 노, 심봉사의 지팡이부터 바다의 파도까지 부채로 표현했다. 자그마한 부채가 무한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소품인 셈이다.

국악 신동으로 불려 온 국립창극단 단원 유태평양은 20여개가 넘는 부채를 갖고 있다. 그중 자주 사용하는 부채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부채(아래)를 공연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고, 판소리에 따라 기러기(위 왼쪽)와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들기도 한다. 유태평양 제공
국악 신동으로 불려 온 국립창극단 단원 유태평양은 20여개가 넘는 부채를 갖고 있다. 그중 자주 사용하는 부채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부채(아래)를 공연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고, 판소리에 따라 기러기(위 왼쪽)와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들기도 한다. 유태평양 제공

무용수가 무용복 여러 벌을 가지고 있듯, 소리꾼도 부채를 여러 개 돌려 쓴다. 유태평양이 가진 부채는 20개가 넘는다. 대부분 화가, 팬들에게 선물 받은 부채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건 아무 그림이 없는 흰색 바탕의 ‘백부채’다. 그림이 있는 부채는 작품에 맞춰 그때그때 고른다. ‘적벽가’를 부를 땐 강하고 힘찬 그림을, ‘춘향가’를 부를 땐 원앙 그림을 고르는 식이다.

소리꾼 부채의 그림은 난초, 소나무, 기러기 등을 그린 한국화다. 어떤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느냐에 따라 부채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수백만원 짜리도 있다. 여느 공연 소품처럼 부채 관리도 까다롭다. 한지 소재라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전용 통에 제습 도구를 넣어 보관한다. 부채는 소리꾼의 영혼이기도 하다. 오래 사용해 낡고 손때 묻은 부채를 액자에 표구해 간직하기도 한다.

새 부채는 접히고 펴지는 움직임이 유연하지 않아서 공연 중 찢어지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가끔 일어난다. 유태평양이 일러 준 사고 수습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런 상황조차 판소리의 묘미죠. 즉흥성이 있잖아요. 당황하지 않고 관객들을 웃기고 넘어가는 센스가 필요하지요.”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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