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사단 동천연대 박소일 병장이 오는 7일로 예정된 전역을 산불진화 작전이 끝날 때까지 연기하겠다고 밝혀 화제다. 사진은 박 병장이 산불진화작전을 펼치는 모습. 강릉=연합뉴스

마른 땅에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淸明)의 4월이라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4월이 늘 생명의 기운으로만 가득하진 않다. 죽음의 화기(火氣)는 일 년 중 가장 왕성하게 삶을 갈구하는 이 시절 수목을 향해 빠짐없이 생채기를 내왔다. 산림청에 따르면 2009년부터 올해까지 10년 동안 전국에서 청명(4월 5일)을 전후한 사흘간 산불이 발생하지 않은 해는 두 차례에 불과했다. 강원 고성군에서 동해시까지 150여㎞ 일대 주민들과 초목을 공포로 뒤덮었던 식목일 전날의 강원 대형산불은 터무니없는 말을 쏟아내는 비정한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작위적일 수 없는 재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4월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5월이 닥치면 누구라도 마주할지 모를 보편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바로 현실의 재난이다.

이번 강원 대형산불은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온 수많은 재난과 동일하게 볼 수 없는 지점이 꽤 많다. 별다른 인과 관계 없이 죽음의 현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력하게 처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던 여타의 ‘산불(재난)’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가장 먼저, 재난을 대하는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이 이전과 다르게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여의도 정쟁에 붙들려 지연되긴 했지만, 국가안보실장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의 적시 현장 지휘는 부처 간 경계와 문턱으로 어려움을 겪을지 모를 재난대응에 대한 우려를 줄였다. 독립기관이 된 소방청이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등으로 갈가리 나눠진 재난방지시스템 지휘권을 움켜쥐어 명령의 누수를 잡아낸 것도 인적ㆍ물적 피해를 그나마 최소 수준으로 붙잡아두는 데 일조했다. 전국 소방차 800여대, 소방관 1만여명이 동해안을 향해 잘 닦인 고속도로를 달려 늦지 않게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변화 덕분이다. 그럼에도 끝내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단체장, 그리고 소방헬기 등 고질적인 방재장비 부족 문제는 물론 질타 받아 마땅하다.

강원 산불진화 과정에서 재난대응 시스템의 개선보다 두드러진 부분은 이름과 직책, 보상의 허울 없이 이웃의 재산과 생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작은 영웅들의 활약이다. 자신의 집이 전소될 위험에 처했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와 환자들을 대피시켰던 속초의료원 직원, 산불이 덮쳐오는 휴게소 주차장으로 쫓아가 쪽잠에 빠져든 화물차 운전자들을 일으켜 세웠던 고속도로 순찰대원, 노약자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혹시나 불에 발이 묶인 이들이 없는지 찾아 나섰던 속초의 이름 모를 배달원. 시스템이 차마 버팀목으로 작용하지 못한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켜낸 이들은 국내 최대규모 산불이 최악의 재앙으로 번지는 상황을 막아낸 은인이다.

대형산불의 생채기를 돌아보며, 어느새 5년이 흘러버린 4월 그날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듯 사람부터 시스템, 사회간접자본까지 재난대응 전반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변화이다. 맹골수도 찬 바다에서 304명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재난 발생 현장 리더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혹시나 주변에 구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다행히 알게 됐다. 이는 2014년 4월의 참사가 2019년 4월의 대한민국에 남겨준 소중한 유산임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2019년 4월 강원 대형산불이 후손 혹은, 내일의 우리에게 전해줄 유산이 있어야 한다. 예상치 못할 재난이 닥칠 미래의 어느 날, 가치를 발휘할 유산 리스트에는 재난현장에서 생명을 내거는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이 우선 올라야 한다. 이어 더 많은 작은 영웅이 나타날 수 있는 토양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더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이타적 유전자’를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 또 다른 재난수업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양홍주 기획취재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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