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차려진 밥상을 걷어찬 다산
◇정조의 계획
정조는 1795년 12월 20일에 이정운(李鼎運)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했다. 같은 날 다산을 용양위(龍驤衛) 부사직(副司直)의 임시직으로 서울로 불러올렸다. 정조는 이정운의 아우인 승지 이익운을 따로 불렀다. “정약용이 계획을 세워 도적을 잡은 일을 그냥 덮어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의 자취를 마땅히 환히 드러내야 한다. 그대의 형이 충청도 경계에 도달하거든 즉각 장계를 갖추어서 올리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마땅히 이를 바탕으로 크게 칭찬하여 그를 등용하고자 한다. 장계는 모름지기 정약용과 서로 의논해서 초고를 잡아 그대의 형이 내려갈 때 가져가게끔 하라.” 12월 24일에는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된 이정운을 따로 불러 자신의 당부를 한 번 더 직접 전했다.
정조는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있으면서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을 체포한 공로를 내세워 복귀의 명분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이정운이 충청도로 내려가기 전에 다산과 함께 장계의 초안을 작성해 가져가게 한 뒤, 도착 즉시 바로 현지에서 조사한 보고인 것처럼 올려 다산의 공을 드러내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익운은 12월 25일 밤 다산이 집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그를 찾아가 임금의 의중을 전했다. 하지만 다산은 뜻밖에도 보고서 쓰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당시 다산이 이익운에게 한 대답이 ‘사암연보’에 보인다. “은혜로운 생각은 진실로 망극합니다. 하지만 도적을 체포한 일로 상을 받는 것은 천하에 큰 수치입니다. 내가 초고를 쓸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만약 보고를 올린다면 나는 형님과 더불어 이로부터 서로 절교할 것입니다.” 다된 밥에 또 코를 빠뜨릴 생각이냐고 이익운이 펄쩍 뛰었지만 다산은 요지부동이었다.
◇염치 없는 짓
이튿날 아침 이정운도 다산에게 편지를 써서 이존창 체포 당시의 정황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보고할 것을 재촉했다. 다산은 이정운에게도 ‘오사께 답함(答五沙)’을 답장으로 보냈다. 다산은 성상의 의중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서도, 사군자는 예의염치를 중시해야 하는데,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한 것을 공로로 삼아 이존창을 체포한 공으로 벼슬길에 복귀하는 것은 한 마디로 염치없는 짓이라며 사양했다. 다산의 편지는 더 길게 이어진다.
“하물며 기찰하고 염탐할 적에는 애초에 함께 참여하지도 않아놓고, 이제 와서 이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한 세상의 이목을 속여 진출하는 바탕으로 삼는다면, 또한 잘못되고 군색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죽을 때까지 구덩이 속에서 불우하게 지내더라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중략) 진실로 집사께서 저의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을 생각지 않으시고 감영에 도착하는 즉시 공문을 올리셔서 한 구절이나 반 글자라도 혹 저에게 공을 돌리시는 일이 있다면, 저는 즉시 상소를 올려 집사께서 사사로움에 따라 임금을 속인 잘못을 낱낱이 탄핵하여 상세히 논할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른다면 장차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늉이나 겸양만의 사양이 아니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기세였다. 편지 끝에 다산은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고 억지로 이 같은 일을 하게 하신다면, 저는 변방에 귀양 갈 각오를 하더라도 감히 도적을 체포한 공을 가지고 스스로를 보고서 위에 나열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번 더 다짐을 두었다.
◇정조, 진노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조는 진노했다. 금정에 내려 보낼 때부터 다짐을 두었던 일이었고, 자신의 의중을 모를 다산도 아니었다. 비난 여론을 무시한 채 어렵사리 구색을 갖춰 복귀시키려는 판에 정작 당사자가 정색을 하고 절대로 못 하겠다고 버티고 나왔다. 화성의 성역(城役)도 이제 한참 완공 단계로 향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느라 정조는 마음이 무척 바빴다. 한시라도 다산을 곁에 불러 올려 함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 속마음을 잘 알면서도 차려놓은 밥상을 걷어차는 다산이 정조는 미웠다.
거짓말을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다산은 이때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존창의 검거는 검거라기보다 자수에 가까웠다. 당시 다산은 천주교 내부의 비선과 닿을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에게 쏠린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이존창을 설득했을 것이다. 이존창과 다산은 1784년 명례방 집회 이후로 오래 동안 교계의 핵심으로 함께 활동했던 사이였다. 둘은 너무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 그를 다산이 제 손으로 검거해 감옥에 넣었다. 다산은 이 일로 자기 이름이 자꾸 오르내리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을 법하다. 한편 이존창의 경우 1791년에도 충청도관찰사 박종악 앞에서 배교를 다짐했던 전력이 있었다. 어떻게든 교회를 지키고 주문모 신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자신의 체포는 그다지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다산은 이존창 체포의 공로자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무엇보다 한때 누구보다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던 자신이 천주교를 와해시키는데 앞장 선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 싫었고, 더욱이 이를 이용해서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는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 일말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미 금정 시절부터 서울에서 들려오는 이기경 등의 동향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자신이 주문모의 피신을 도와준 사실도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었다. 어렵사리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의 ‘가례질서’ 편집을 주도한 일을 두고도 비난과 비방의 강도가 흉흉했다. 이런 와중에 5개월 만에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요직에 진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또 다산과 한편인 이정운이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자 마자 이미 이곳을 떠난 정약용의 보고서를 받아 그 공로를 상신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미리 짜고 치는 노름판의 모양이어서 구설이 없을 수가 없었다.
◇미뤄지는 복귀
다산의 완강한 거부로 그의 복귀는 한정 없이 미뤄졌다. 그렇게 1796년의 새해가 밝았다. 정조는 다산이 자기 뜻을 거스른 일로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다산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이때 다산의 후임으로 금정찰방이 되어 내려갔던 김이영(金履永)이 돌아와 보고했다. “그가 금정에 있을 적에 성심을 다해 백성을 보살피고,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하면서도 근신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정조는 이번에는 노론의 영수 심환지(沈煥之)의 옆구리를 찔러 다산을 등용할 것을 주청케 했다. 정조의 밀찰(密札) 통치는 몇 해 전 심환지에게 보낸 무려 297통에 달하는 비밀 편지가 공개되면서 분명히 드러났다. 정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미리 신하에게 귀띔하여 그가 발의한 것처럼 모양새를 갖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곤 했다. 예민한 정치 현안일수록 이같이 막후 정치의 수완이 위력을 발휘했다.
이때도 정조는 다산을 위해 대립적 위치에 있던 심환지의 입을 빌렸던 듯하다. ‘사암연보’에는 심환지가 정조에게 “정 아무개가 군복의 일로 인해 특명으로 벼슬을 그만두게 한 뒤 이제껏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쓸 만합니다. 게다가 금정에서 백성을 교화시킨 바가 많으니 청컨대 다시 거두어 쓰소서”라고 건의했다고 적혀 있다. 군복의 일은 1795년 3월 숙직 당시에 융복을 입지 않았다가 견책을 입은 일을 말한다.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윤허하고, 형조록(刑曹錄)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내렸다. “근래 조정 대신의 말을 들으니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가 밖에서 부임한 찰방이 성심으로 교화한 덕분에 괄목할만한 효과가 있었다 한다. 이에 특별히 중화척(中和尺)을 하사하노라.” 형조록은 죄인에 대한 판결 내용을 기록하여 정기적으로 올리는 보고였다. 공식적인 기록에 근거를 남겨둔 것이다.
◇죽란시사 결성
다산은 정조가 하사한 중화척(中和尺ㆍ국왕이 중화절을 맞아 신하들에게 하사하던 자)을 받고, 명에 따라 임금이 지은 시 두 수에 대해 화답시를 지어 올렸다. 다산은 이때 올린 시에서 “터럭만큼 보답도 하지 못한 채, 큰 도량의 용서하심 크게 입었네(未有纖毫報, 偏蒙大度容)”라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1796년 2월 6일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이해 10월까지 벼슬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다산은 집에서 한가하게 묵은 글상자를 정리하거나 벗들과 왕래하며 지냈다. 고향 초천과 하담 선영을 다녀오면서 원주 법천에 들러 정범조 등을 찾아보기도 했다. 벼슬에 임명 받지 못한 시일은 이렇듯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존창을 붙잡은 공으로 벼슬을 하기 싫다고 했지, 벼슬에 나가 역량을 펼칠 생각마저 없었던 아니었기에 당시 다산은 얼마간 채제공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5월 말 다산의 집에서 죽란시사(竹欄詩社)가 결성되었다. 다산이 쓴 ‘죽란시사첩서(竹欄詩社帖序)’를 보면, 이 모임은 동갑인 다산과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이 주도해서 자신들보다 나이가 아래 위로 네 살 터울 이내의 소장파 기호 남인들로 구성했다. 대부분이 채제공 옹위 그룹인 채당(蔡黨)의 인사들이었다. 모두 15명이 참여했고, 이유수(李儒修), 홍시제(洪時濟), 이석하(李錫夏), 이치훈(李致薰), 한치응(韓致應), 심규노(沈奎魯), 윤지눌(尹持訥) 등이 참여했다. 계원의 명단과 규칙을 적인 계첩(契帖)이 남아있다. 채제공은 이 모임의 결성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죽란은 다산의 명례방 집 좁은 마당에 대나무로 난간을 쳐서 꽃나무 화분을 길렀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이 모임이 주로 다산의 집에서 열렸기 때문에 시사의 이름도 죽란시사였다. 이 시기에 지은 다산 시문집에는 남인의 원로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를 잇달아 올리고, 죽란시회에서 지은 시를 채제공에게 보여 우회적으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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