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정치’를 한다는 문재인 정부를 ‘문송(문과라서 죄송)’한 정부라 치부하면 다소 지나친 말일 것이다. 여태 ‘과학기술학 정치’를 해 온 정부도 없을뿐더러, 따지고 보면 ‘문송’하지 않은 정부 또한 없었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는 과기부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했다. 현 정부 들어 연구자 중심으로 연구지원 체계를 바꾸고 처우를 개선한 일이나 과학기술분야의 정책적 자율성을 높이고 최고 심의기구의 위상을 높인 점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이명박 정부 때는 과학기술 주무부처가 사라지고 교육과학기술부로 통합되었다. 이후 국가차원의 과학기술 관련 컨트롤타워로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상설 행정위원회로 발족시켰으나 박근혜 정부 때 폐지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공계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의 정체성이 전문 이공계인은 아니다. 익히 알려졌듯이 박근혜 시절의 요직은 공안검사 출신들 차지였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 관련 부처의 인사는 초반부터 매끄럽지 못했다.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지명된 박기영 교수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지명된 박성진 교수는 학계 등의 반발 끝에 사퇴했다. 며칠 전에는 신임 과기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이 철회됐다. 현 정부 들어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각종 의혹과 의문이 있었지만 이른바 부실학회에 참석했던 일이 결정타였다. 이 사실을 본인이 밝히지 않아 미처 몰랐다는 청와대의 해명은 더 궁색해 보인다. 다른 부서도 아니고 과기부 장관직이라면 이 분야에서 통용되는 최소한의 규범은 미리 챙겼어야 했다. 인사검증체계가 부실했다는 상투적인 비판조차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단지 인사검증체계만 부실한 탓이라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장관 후보자의 지명이 철회되기 보름쯤 전에 나는 이 지면을 빌려 과학기술의 마인드 부재가 문재인 정부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음을 우려했었다. 디테일한 절차나 제도의 문제 이전에 기본적인 철학과 자세의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경제학의 작동원리와 과학기술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잇따른 과학기술계 인사 문제는 전자로 후자를 대신하려다 생긴 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한 24조 원대 23개 사업 중에는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 같은 사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다. 지난 90년대부터 추진된 이 사업은 번번이 예비타당성조사에 막혀 좌절되었다. 건립비용은 ‘겨우’ 3,000억 원 안팎이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경제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로와 철도를 깔고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데에 경제논리보다 지역균형발전의 가치가 우선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왜 유독 과학 분야만 피해 다니는 걸까?
지난 세월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87년 체제를 이어오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복지를 향한 우리의 시선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철학과 시선, 마음가짐을 바꾸는 문제는 처우개선과 연구비 증액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는 마치 전두환 철권통치 시절에 경제성장률이 높았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진전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과도 같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철학과 마음가짐, 작동방식의 문제이다. 월급이 아무리 오른다 해도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언론이 권력의 시중 노릇하는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금의 청와대 직제를 들여다보면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든다. 노무현 정부 이후 다시 부활한 청와대 정책실은 국가차원의 정책 조율과 관리가 목적이다. 정책실장 아래 경제보좌관과 과학기술보좌관이 있고 일자리수석, 경제수석, 사회수석 등 세 명의 수석비서관이 있다. 일자리는 경제의 일부이다. 그러니까, 청와대 정책실에는 경제보좌관 1명에 경제관련 수석이 둘이다. 초대 정책실장은 경제학자 출신이었다. 청와대 조직도에 담긴 철학은 과학기술이 경제를 ‘보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조직은 철학이 실물화된 형태이다. 정책실에 일자리수석이라는 ‘옥상옥 수석’을 만든 이유는 일자리 창출이 가장 시급한 국정현안이기 때문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준비하는 청와대라면 과학기술도 그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사회수석의 업무 중엔 기후환경도 있다. 김연명 사회수석비서관은 사회복지 전문가이다.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등에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 과학기술의 담론이 범 부처에 걸쳐 국정전반에 녹아들 수 있을까?
이번 강원도 산불을 유례없이 신속하게 진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소방청 독립이 큰 힘이 되었다. 불을 끄는 데에는 다른 무엇보다 소방의 논리가 우선적으로 작동해야 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과학자의 것은 과학자에게.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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