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하는 여성들
축구는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학생에게 권장된 공놀이는 발야구나 피구 정도였다. 조기 축구회는 성인 남성만 회원으로 받았고, 회사 체육대회 축구 경기는 남성들끼리 뛰고 즐기는 잔치였다. 세계인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임에도 불구하고 이란에서는 여성의 축구장 입장을 여전히 금지한다. 축구는 ‘여성이 하거나 보는 것만으로 유별나다는 말을 듣는 운동’이었다.
그런 축구가 달라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면서다.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아마추어 여자 축구클럽’이 생겨나고 있고, 축구하는 여성들은 보다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 지난 6일 경기 용인시민체육공원 주경기장에서 열린 한국 여성 축구 대표팀과 아이슬란드 대표팀의 A매치 평가전에는 여성 대표팀 경기 사상 최다 관중인 1만 5,389명이 들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축구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여성들의 발 놀림이 분주해지고 있는 것이다.
◇축구는 남성만? 우리도 축구 한다!
토요일인 6일 오전 서울 쌍문동 덕성여대 풋살장. 여성 11명이 축구공을 쫓아 푸른 잔디밭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주말마다 열리는 성인 여성 아마추어 축구클럽 ‘FC슛탱글(Shoot-angle)’의 미니 게임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부상자가 나올 정도로 격한 접전 끝에 4:3의 스코어를 기록하며 경기가 끝났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반 20분, 후반 20분간 축구를 한바탕 즐긴 여성들은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즐거워했다.
슛탱글은 지난해 9월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 운동가 강다현씨가 주도해 만들었다. 강씨가 지난해 참가했던 서울시 지원 프로그램에서 여성 축구의 지속가능성을 확인한 이후 여성 코치 두 명을 섭외해 모임을 꾸렸다. 회원은 40여 명. 매주 토요일 오전 10여명이 풋살장에 나와 패스, 드리블, 킥 등 기본기를 훈련하고 미니 게임을 뛴다. 시작은 미약했을지 몰라도 아마추어 축구 클럽의 모양을 갖춰 가고 있다. 드넓은 운동장을 뛰기에는 인원이 아직은 충분치 않아 실내에서도 할 수 있는 5인제 미니 축구 ‘풋살’로 대체하고 있지만, 언젠가 담장 너머 운동장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다.
슛탱글에는 규칙이있다. 회원끼리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 직업 등을 밝히지 않는 것이다. “달님” “꾸꾸쌤” 같은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한국 사회에선 나이가 어리면 발언권이 제한되거나 은연 중에 무시당하잖아요. 우리는 축구 하려고 만난 거니까, 축구장에서만큼은 ‘내가 존재하고 싶은 모습’으로 존재했으면 했어요.” 강씨의 설명이다. 또 한가지 금기는 ‘쓸데 없는 지적질’이다. “남녀가 섞인 혼성 축구 모임에서 뛸 때 ‘왜 화장을 하지 않고 오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축구를 하고 싶을 뿐인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답답했어요. 그래 ‘축구’ 말고 다른 기준으로는 서로를 평가하지 않는 모임을 만든 거예요.”
◇축구의 매력? 금기를 뛰어넘는 쾌감!
슛탱글 회원 대부분이 선수 출신도, 운동 천재도 아니다.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공을 제대로 차본 경험도 없었다. 황금 같은 토요일 아침 축구를 하러 나오는 이유는 대체 뭘까. 회원 이문경(29)씨는 슛탱글에서 축구를 처음 배운 ‘완전 초보’다. 그는 발뿐 아니라 “온 몸을 쓰는”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일상 생활에선 몸을 쓸 일이 거의 없잖아요. 여성들은 특히 더 그렇고요. 여기 와서는 몸을 끝까지 쓰게 되는 거예요. 공 앞에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면 코치님이 ‘문경, 끝까지!’라고 해 주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전력을 다해 뛰는 느낌’에서 삶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도 있다.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해왔지만 축구는 처음이라는, 별명이 ‘이동’인 한 회원의 이야기다. “정신 없이 뛰다 보면 심장 박동이 엄청 빨라지는데, 그게 괴로우면서도 기분이 무척 좋아요. 운동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렇게 심장 뛰는 느낌으로 살고 싶어요(웃음). 일상과는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하고 다른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배워 가는 게 재밌어요. 멋진 여성들로 구성된 준거 집단이 생기는 건 덤이고요.”
지난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민음사)라는 축구 에세이를 쓴 김혼비(38ㆍ필명) 작가는 ‘금기를 뛰어넘는 쾌감’에서 축구의 매력을 찾았다. 평범한 회사원이자 5년차 주부인 김 작가는 오랫동안 ‘보는 축구’의 팬으로 지내다 2015년 여자 축구팀의 문을 두드렸다. “다른 운동에 비해 축구는 유독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운동이잖아요. 축구라는 경험을 아예 못해봤으니까 ‘미지의 세계’인 셈인데, 막상 해보면 땀을 흠뻑 흘리면서 아주 넓은 공간을 누빈다는 감각이 엄청 활기를 줘요. 금기시됐던 것을 뛰어넘어 마음껏 활보한다는 쾌감이 축구의 매력 아닐까요?”
◇‘축구 맨스플레인’은 사절!
아마추어 축구 경기는 여자 팀끼리 맞붙는 게 보통이지만, 실력이 있다면 남성 팀과의 경기도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다. 숙명여대 06학번 동기들이 꾸린 아마추어 축구팀인 ‘FC차차’는 1년에 5, 6번씩 남성팀과 친선 경기를 갖는다. 차차 회원 홍지원(32)씨는 “신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 수준만 맞추면 여성, 남성 구분 없이 즐겁게 공을 찰 수 있다”고 했다. 맞붙는 남성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이란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부인할 수 없는데, ‘게임’이 될까. 홍씨가 일축했다. “운동에는 체력도 중요하지만 연륜도 무시 못해요. 차차는 대학 여성 축구 리그에 나가 1등을 했을 정도로 진짜 잘하는 팀이라고요.”
연륜과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여성 축구 선수들은 자주 억울해진다. “여자가 해 봤자지. 축구라면 남성인 내가 한 수 가르쳐 주마.” 얕잡으며 덤비는 남성들의 ‘맨스플레인(Mansplainㆍ남성이 여성에게 시시콜콜 설명하는 것으로 우위를 과시하려 하는 현상)’이 축구장에서 유독 심해진다. 김 작가는 “프로 선수 경력까지 있는 여자 축구 선수들을 무턱대고 가르치려 하는 남성들이 있다”며 “‘남성의 영역’에 겁 없이 들어온 여성을 향한 일종의 호구조사인 셈”이라고 했다.
‘남성들의 축구장’에서 여성은 여전히 환영 받지 못한다. 개근을 기록하며 슛탱글의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인 안은비씨의 경험담. “회사에서 풋살 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여성은 저 혼자뿐이었어요. 남성인 주최자가 저만 콕 찝어 ‘오실 건가요?’라고 묻더군요.” 역시 슛탱글 소속인 노모(30)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어릴 때는 남자 아이들과 축구 할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나이 들면서 기회가 점점 사라지더니, 대학 때 교양축구 수업에서 여성은 저밖에 없더라고요. 수업 중에 공에 제 발이 닿기만 해도 남성들이 환호했어요. 저를 동등한 선수로 대해주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 이 즐거운 축구, 진작 할 걸!
축구가 그렇게 재미있고 보람찬 운동인데, 여성들은 왜 축구를 하지 않았을까. 김혼비 작가는 “질문이 틀렸다”고 꼬집었다. “여성은 왜 어릴 때부터 축구 할 기회가 없을까?” 혹은 “여성은 정말로 운동을 싫어할까?”라고 고쳐 물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은 축구를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므로. “축구팀에는 30대 여성이 별로 없어요. 20대 아니면 40~50대가 많아요. 결혼과 육아 때문에 축구를 그만둘 필요가 없는 나이니까요. 여성들은 일 나가고 아이 돌보는 시간을 쪼개서 일상으로 축구를 밀어 넣어요. 그 여정 자체가 골대 안으로 어떻게든 골을 밀어 넣어야 하는 축구 경기인 셈이에요. 여성들이 하는 축구라는 ‘운동(Exercise)’은 사회적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나간다는 점에서 ‘운동(Movement)’이 될 거예요.”
비장하던 김 작가의 목소리가 어느새 바뀌었다. “무엇보다 축구 이거, 너무 재밌어요. 일단 한번 해보자고요. 진짜 기절해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김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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