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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환대에 대하여

입력
2019.04.06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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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월을 보내기 위해 일을 중단하고 온 곳은 미국 버지니아주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새벽에 도착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보니 침대 옆에 작은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꾸러미에는 생필품과 과자가 담겨 있었고, 지역에서 활동 중인 어느 여성 그룹에서 준비한 것이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주다니, 이런 경험은 생경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머무는 마을은 도심 외곽에 있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이다. 멀리서 보면 고즈넉한 풍경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낙후되거나 관리가 잘 안 되어 있는 집들이 많고, 주로 흑인들이 모여 산다. 동네 빨래방이나 슈퍼에는 대부분 흑인만 온다. 이곳에서 나는 인종적, 문화적 소수자로 살고 있다. 한국 사람은 물론 아시아 사람은 거의 없다.

소수자로서 경험은 내가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이동할 때 우선으로 경험하는 감각이다. 나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해 음식과 생활양식과 문화를 배우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내 안에 다양한 문화가 경합을 벌일 것이다. 문화적 경합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또 소수자로서 산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소수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피곤하고,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이곳에서 외로움이나 고립감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서울에 살 때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서적 피곤함은 덜하다.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를 지녔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상식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기울이고 제공하려고 한다.

언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청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은 이해할 때까지 적절한 단어나 의사소통 방식을 찾는다.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귀 기울이고 존중할 때, 나의 삶은 단지 소수자로서 배제되는 삶이 아니라, 여러 삶 중의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나는 이것을 환대라고 생각한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온 이주민들이 새로 오는 이주민인 나를 위해 또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것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존재라는 감각,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그런데도 나와 상대는 서로를 해치지 않고 신뢰를 쌓으며 서로의 안정감과 안전함을 지켜주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환대를 경험하게 한다. 물론 환대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을 위해 내 자리를 내어주거나, 나의 자원을 공유하거나 시간을 할애해서 마음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환대가 가능한 조건은 여백이 있는 삶이다.

그리고 환대는 결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도한 친절, 무한정 포용이 환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며칠 전에는 지역 커뮤니티 모임에서 진행하는 영어 기초반 수업에 보조로 참여했다. 또 지난주에는 난민촌에서 아이들 숙제도 돕고, 함께 놀았다. 나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지역사회에서 찾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지역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함께 게임을 할 예정이다.

이곳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한국에서 만난 이주민들이 생각났다.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들에서,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차별받는 아이들,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오래된 차별 등 사람의 이동은 이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전 지구적인 자본의 이동, 노동의 이동, 문화적 이동, 또 재난 등으로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비해 인식은 아직도 배제하고 구분 짓는 데에 익숙하다. 이주민이 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일지, 개인의 일상에서부터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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