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누나를 둔 아이 친구의 엄마와 최근 만났을 때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딸이 속한 반의 엄마들이 있는 단체 온라인 대화방에 같은 학교 아이들 여럿의 이름이 적힌 메시지가 올라왔다는 것이다. 인근 유명 학원들에서 이른바 ‘최상위 반’에 배정돼 있는 아이들 명단이었단다. 사설 학원의 특정 반에 누구누구가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명문이라는 중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선 학원가 모범생 명단이 그렇게 소리 없이 공유되고 있다.

공교육이 학생들을 성적에 따라 ‘줄 세우기’ 하지 않겠다고 ‘시험 없는 학교’를 만든 사이, 줄 세우기는 기다렸다는 듯 사교육 시장으로 넘어갔다. 공교육의 줄 세우기도 문제 많지만, 사교육의 줄 세우기는 더 심각하다. 그 많은 학원마다 시험 문제가 다르고 평가 기준도 천차만별이니 어느 줄이 제대로 된 줄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은 어느 줄에든 자식이 되도록 앞에 서는 걸 보고 싶어한다. 학원이 주도하는 줄 세우기에 따라가다 학부모들 지갑은 구멍 날 지경이 된다.

시험 없는 학교 정책 덕분에 요즘 대다수 초등학생은 학교에서 성적으로 줄 서본 경험 없이 졸업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많은 학생들이 1년 동안은 시험 대신 토론과 실습, 프로젝트 수업, 진로 탐색을 위한 체험 학습 기회를 갖는다. 학생들에게 숙제와 시험의 부담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사고력을 마음껏 기르고, 원하는 꿈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는 취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중학교 1년이 지나면 공교육에서도 줄 세우기가 시작된다. 시험 일정과 성적표를 받아 든 학생 입장에선 7년 동안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듯 보였던 학교가 갑자기 돌변한 셈이다. 사교육 시장에 일찌감치 진출해 성적으로 줄 좀 서본 아이들은 급변한 환경에 무난히 적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책 취지대로 학업 부담 없이 자유 활동에 집중해온 아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앞줄 친구들만 학교에서 ‘관리’한다는 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아이마저 생긴다.

많은 학부모가 최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 기초학력 저하의 원인으로 이처럼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을 지목한다. 현 교육 체계로는 아이들이 초∙중∙고교 재학 기간의 절반은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다 나머지 절반은 시험이 인생을 결정할 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학교에는 없는 시험을 학원에서 훈련해온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공교육의 줄 세우기가 시작되는 중학교 2학년 때 출발선이 엄연히 달라진다.

과학자들은 교육 정책의 이 같은 접근이 근본적으로 창의성이나 사고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의 창의성과 사고력이 기본 교과과정을 습득하는 것과 별개로, 시험이나 숙제 부담이 없는 ‘자유로운’ 환경에 놓여야만 길러질 수 있다고 보는 건 명백한 오해라는 설명이다. 또 창의성과 사고력이 학교 시험에서 정답을 찾는 능력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한 생각이라고 과학자들은 지적한다.

창의성과 사고력의 기반은 다름 아닌 기초지식이다. 기초지식의 토대가 건실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창의성과 사고력을 기르기 어렵다. 학교에서 배운 기본 교과과정 내용을 학생이 충분히 이해하고 정확히 받아들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 기초지식이 튼튼히 받쳐주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엉뚱하고 기발한 발상을 모두 뛰어난 창의성이라고 오판하는 건 위험하다. 언뜻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듯 보이지만 기본 원리와 정설을 건너뛴 탓에 인정받지 못하는 이른바 ‘유사과학’이 그런 예다.

논리와 지식이 부실한 창의성은 과학이나 공학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과학자들은 강조한다. 기초학력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 창의성만 부르짖는 건 그런 점에서 어불성설이다. 기본 교과과정을 익히고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아이들의 기초지식은 단단해질 수 있다. 그 위에서 자라는 창의성과 사고력이야말로 진짜다. 아이들이 기초지식의 옳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격려하면서 그 과정이 무분별한 성적 줄 세우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는 공교육이 절실하다.

지금의 교육 체계대로라면 2년여 뒤 한창 사춘기일 시기에 우리 아이도 ‘시험 있는 학교’를 만나게 된다. 그때를 대비해야 하나 싶어 자꾸 학원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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