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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파죽지세 나폴레옹 물리친 영국군, 최대 무기는 소득세였다

입력
2019.04.06 10:0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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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2차 대프랑스 동맹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에 놀란 유럽 왕정국가들은 여러 차례 대(對)프랑스 동맹을 맺고 혁명 전파 차단에 나섰다.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한 오스트리아 군이 1800년 이탈리아에서 격돌한 마렝고 전투를 묘사한 그림. 프랑스 군인이자 화가인 루이 프랑수아 르쥔의 1802년작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에 놀란 유럽 왕정국가들은 여러 차례 대(對)프랑스 동맹을 맺고 혁명 전파 차단에 나섰다.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한 오스트리아 군이 1800년 이탈리아에서 격돌한 마렝고 전투를 묘사한 그림. 프랑스 군인이자 화가인 루이 프랑수아 르쥔의 1802년작이다.

1792년 프랑스 주변의 모든 왕정국가들은 1차동맹을 맺고 왕을 폐한 프랑스를 짓밟으려 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스페인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 있던 네덜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전역이 프랑스의 반대편에 섰다. 프랑스의 우방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독립전쟁 때 파병의 도움을 받은 미국조차 원군을 보내길 거부했다. 프랑스는 1793년 1월21일 루이16세를 처형하고 전의를 다졌다. 서전에는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자유, 평등, 우애를 내세운 프랑스군은 서서히 실지를 회복했다. 특히 1796년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열세였던 이탈리아 전선을 휘저으면서 프랑스를 압살하려는 1차동맹이 깨졌다.

약 8개월간의 소강상태는 나폴레옹이 영국이 지배하던 이집트 원정에 나서면서 끝이 났다. 2만9,000명의 나폴레옹 부대는 원정길에 시칠리아 밑에 위치한 섬 몰타도 공격했다. 1530년 이래로 몰타를 지배해온 병원기사단(예루살렘 순례객을 구호하는 병원에서 기사단이 출범한 데서 유래한 명칭) 병력은 7,0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기사단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 기사들은 프랑스군과 싸우길 거부했다. 결국 항복한 기사단장은 연금을 약속 받고 섬을 떠났다. 이는 기사단 명예대표인 러시아 황제 파벨1세를 화나게 했다.

1798년 구체제 왕국들은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한 2차동맹을 결성했다. 1차동맹국 중 스페인은 프랑스의 속국이 됐고 프로이센은 중립을 지켰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라인강을 기준으로 땅을 나누기로 한 데다가 동쪽의 폴란드를 삼키느라 바빴다. 대신 화가 난 러시아가 프로이센의 자리를 메웠다. 같은 시기에 미국은 프랑스와 별개의 전쟁을 치렀다. 미국독립전쟁 때 프랑스가 빌려 준 돈을 미국이 갚지 않아 벌어진 전쟁이었다. 미국은 돈을 빌려준 주체가 프랑스 왕이라 왕이 없는 프랑스에는 갚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미국인들은 독립 후 조지 워싱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었다.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송정근 기자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송정근 기자

◇수세 몰린 영국이 꺼내든 비책

2차동맹국 중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왕국은 영국이었다. 이집트를 나폴레옹에게 내준 것은 물론이고 1차동맹 말기엔 본토를 공격 받았다. 1797년 2월22일 1,40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은 웨일스 서부인 피쉬가드에 상륙했다. 이에 맞선 영국군은 동네 아저씨까지 긁어 모아도 700명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프랑스군을 지휘한 미국인 윌리엄 테이트는 악천우와 기강해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틀간 전투 후 항복했다. 현재까지도 피쉬가드 전투는 외국군이 영국섬에 발을 디딘 마지막 전투다.

당시 전세계에 제국을 구축한 영국의 본토 인구는 1,000만명 정도였다.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2,600만명 이상이었다. 똑같은 병력의 손실이어도 영국의 타격이 프랑스보다 컸다. 더구나 육상전투에서 프랑스 병사의 강인함은 이전 루이14세 때부터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억지로 끌려 온 병사들로 구성된 구체제 군대는 자발적으로 싸우는 혁명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기 쉽지 않았다. 영국으로서는 이를 타개할 대책이 필요했다.

영국의 대책은 바로 소득세였다. 보다 더 많은 함선과 무기로써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798년 말 도입이 결정돼 1799년부터 실제 부과되기 시작했다. 통념과 달리 당시 소득세는 낯선 개념이었다. 이전까지 소득세는 어느 나라에서도 부과된 적이 없었다.

◇전쟁 있는 곳에 세금 있다

고대 유럽의 세금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납이었다. 부역은 강제로 부과된 노동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토목공사나 경작에 동원되었다. 귀족, 성직자 등 특권층은 대개 면제였다. 공납은 임의로 할당된 물품을 납부할 의무였다. 가령 금이 많이 나면 금 일정량, 곡물이 많이 나면 곡물 일정량을 걷었다. 왕정에 보내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수탈하는 공납 징수관리는 흔하디 흔했다. 이른바 세리는 왕을 제외한 모두가 증오하는 존재였다.

중세에는 새로운 형태의 세금, 인두세가 추가됐다. 글자 그대로 사람 머릿수대로 내는 세금이었다. 이슬람에서 유래된 인두세를 1275년 유럽 최초로 도입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도입 목적은 언제나 그랬듯 전쟁 때문이었다. 기존의 부역과 공납에 추가된 인두세는 전혀 인기가 없었다. 1381년의 세 번째 인두세 징수는 와트 타일러의 농민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은 이후 인두세를 징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698년 제도를 폐지했다.

영국 왕정이 세금을 전적으로 포기할 리는 없었다. 1662년에는 이른바 벽난로세를 신설했다. 도망가거나 숨는 사람보다 집에 있는 벽난로가 세기 쉽다는 이유였다. 1689년 잉글랜드의 벽난로세는 폐지됐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선 이후로도 지속됐다. 대신 잉글랜드는 1696년 창문세를 새로 도입했다. 벽난로는 집안으로 들어가야 확인할 수 있는 반면 창문은 집밖에서도 확인 가능했다. 이외에도 왕정은 벽돌세, 유리세, 벽종이세 등을 추가했다.

말하자면 소득세는 새로운 세금을 징수할 명목을 찾지 못한 영국의 고육지책이었다. 소득이 60파운드를 넘으면 1파운드당 2펜스를, 200파운드를 넘으면 1파운드당 2실링을 내야 했다. 1파운드는 20실링과 같고, 1실링은 12펜스와 같았다. 즉, 세율이 60파운드 이상에서는 1%에 약간 못 미쳤고 200파운드 이상에서는 10%였다. 영국의 소득세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인 1816년 폐지됐다가 1842년에 부활된 후 다시는 없어지지 않았다.

미국에 소득세가 생긴 이유도 전쟁에 기인했다. 애초 미국인들은 세금을 혐오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이유도 영국이 부과한 세금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모든 출판물에 세금을 물리는 영국의 1765년 인지법은 “대표 없으면 세금도 없다”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775년의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차법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랬던 미국은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약 4개월 후인 1861년 8월 5일, 소득세 부과를 결정했다. 소득이 800달러를 넘으면 세율 3%가 적용되었다.

◇곳간의 힘은 막강했다

소득세로 보강된 영국군은 1799년부터 공세에 나섰다. 초반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 가령 8월에는 러시아군과 합동으로 프랑스 지배하의 네덜란드에 상륙했다. 상대적 병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영국-러시아 연합군은 수세로 몰려 결국 11월 도망치듯 후퇴했다. 설상가상 평생 무패를 자랑한 러시아의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병사하며 러시아가 전열에서 탈락했다. 그나마 시리아를 노린 나폴레옹 부대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게 영국 입장에선 성과였다. 나폴레옹은 부대를 버려두고 프랑스로 돌아와 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곳간의 힘은 막강했다. 1801년 영국 육군은 오스만군과 힘을 합쳐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차례로 탈환했다. 이집트를 점령했던 프랑스 부대는 결국 항복했다. 중립을 선언한 프로이센, 러시아, 덴마크, 스웨덴의 4개국은 해상을 통해 프랑스와 교역을 계속하자, 하이드 파크가 지휘하는 영국 함대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항을 습격해 승리를 거뒀다.

영국은 1802년 3월 25일 프랑스와 아미엥 조약을 맺었다. 왕이 없는 프랑스를 국가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아미엥 조약에는 몰타에서 영국군이 철수하고 중립적인 병원기사단에게 되돌려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철군을 거부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1803년 5월18일 영국은 프랑스에게 다시 선전포고했다. 소득세는 1년이 넘는 정전기간에도 계속해서 징수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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