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5시 서울중앙지법 523호 법정. 사업가 신모(59)씨는 17년 동안이나 고대하고 소망하던 재심 재판에 출석했다. 2002년 ‘명동 사채왕’ 최진호씨 일당이 조작한 사건 때문에 마약 소지 범죄자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그는 “이제야 누명을 벗을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특히 이날 재판은 그에게 누명을 씌운 의혹을 받는 사채왕 최씨의 증인 출석이 예정된 날이었다. 17년 묵은 억울함을 풀고, 사채왕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신씨는 이날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허무하게 법원 문을 나서야 했다. 먼저 사채왕의 증인 출석이 불발됐기 때문이다. 법원이 보낸 증인 소환장은 폐문부재(문이 잠겨있고 사람이 없음)라는 사유로 반송됐다. 최씨는 징역 8년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 어디 밖으로 다니지도 못하는데 소환장이 전달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최씨의 결백을 입증할 증인의 증언 역시 검사의 준비부족으로 무산됐다. 검사는 도리어 재판부에 “증거를 정리한 뒤에 증인을 신문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며 재판 기일을 미뤄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재판은 다음달 14일로 미뤄졌고 전북 전주시에서 올라왔던 증인은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다.
물론 검찰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증인 신문 준비는 마쳤지만 증거가 제출되지 않아 신문을 진행한다 해도 다음에 또 불러 같은 내용을 물어야 한다”면서 “일단 증인을 불러 설명을 듣겠다는 재판부 판단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건 재심부터 취재했던 기자로서는 안타까운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범죄자 계략에 빠져 전과자 누명을 썼던 평범한 사업가의 결백 입증 기회가 검찰의 ‘준비 부족’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날라갔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이 무고한 시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재심이라는 점을 감안했다면 검찰이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2월 부임한 담당검사가 ‘인사발령 한 달만이라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핑계를 댄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채왕 최씨가 폐문부재를 이유로 출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은 점도 심각한 문제다.
검찰은 틈만 나면 “검사는 ‘공익의 대변자’로 피고인의 범죄를 입증하는 책임뿐 아니라 억울하게 기소된 피고인의 무고함도 입증해야 하는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검찰은 과도한 업무와 기계적 절차만 핑계대며 관성대로 처리했을 뿐, 오류를 바로잡는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는 못했다.
정반석 사회부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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