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촌1품(OVOP)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슬라멋 위도도씨가 1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람풍주 나립마을 커피밭에서 커피 열매를 따고 있다. 람풍=고찬유 특파원

추락방지 난간이 없는 편도의 열대 우림 산길을 1시간 넘게 차로 아슬아슬 달렸다. 다 올라가기도 전에 내려갈 밤길이 겁났다. 습한 구름을 밀어내고 구비구비 해발 800m 마을에 닿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산의 숨결보다 주민들의 미소가 진정제다. 어른들의 서먹한 인사를 ‘빼꼼’ 지켜보던 아이들은 외지인과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안으로 숨어들었다.

수마트라섬 람풍주 탕가무스 지역의 나립마을은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다시 차로 3시간30분 거리에 있다. 마을엔 코프라시 프로두센 스리칸디 마주 버르사마(Koperasi Produsen Srikandi Maju Bersama)라는 긴 이름의 조합이 있다. 뒤부터 풀면 ‘함께 전진하는 여걸 생산조합(여걸조합)’쯤 되겠다. 커피 상품명인 스리칸디(여걸)는 그림자극의 여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조합원 201명 중 191명이 여성이고 조합장도 여성이다. 스리 와우니(45) 조합장은 “10여년 전 6명으로 커피 농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람풍주 나립마을의 협동조합 앞에 걸린 커피 제조 과정 현수막과 로스팅기계(오른쪽), 그라인딩기계. 람풍=고찬유 특파원

벽돌 조합건물 앞엔 커피 로스팅(배전)기계와 그라인딩(분쇄)기계가 수줍게 낡아가고 있다. 커피 생산 과정을 담은 현수막도 내걸렸다. 건물 뒤편이 주민들이 플랜테이션이라고 부르는 커피농장이다. 뭔가 산만해 보이는 농장은 언뜻 열대 우림의 일부로 여겨졌다. 모기들이 능숙하게 사람 피를 뽑는 동안 슬라멋 위도도(38)씨가 노련하게 붉은 커피 열매를 수확했다. 그는 15년 경력의 지도자다. 물에 넣어 가라앉는 커피 열매만 골라 기계로 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말린다.

커피 열매를 볶고 가는 작업은 영세하고 투박했다. 용량 15㎏의 로스팅기계는 온도계 눈금이 잘 안 보였고, 그라인딩기계는 땜질한 부위들이 덜덜거렸다. 이래봬도 둘 다 누군가가 기증한 귀중품이다. 위와티(40)씨는 “커피콩으로 팔 때보다 볶으면 2배, 볶아서 갈면 2.5배 더 번다”고 했다. 200g당 볶은 커피는 6,400원, 가루 커피는 8,000원으로 우리나라에서 커피 두 잔 값 정도다. 조합의 1년 매출은 800만원(1억루피아)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람풍주의 산촌 나립마을 주민이 1일 막 분쇄한 커피 분말을 보여주고 있다. 람풍=고찬유 특파원

여걸조합은 가난을 벗기 위해 변화를 꾀하고 있다. 얼마 전엔 두 명이 아라비카종 재배방법을 전수 받아왔다. 공정은 복잡하지만 현재 다루는 로부스타종보다 돈이 돼서다. 사티요(45)씨는 “생산량, 품질, 가격을 높이고 싶은데 우리 힘으로는 벅차다”고 호소했다.

인도네시아 중앙 정부도 나섰다. 조합중소기업지원부(KUKM)가 후원 기업을 연결해주는 식이다. 인도네시아는 2007년 세계 최초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의무화한 나라다. 함께(Royong) 어깨에 진다(Gotong)는 뜻의 ‘고통 로용’ 정신이 몸에 밸 만큼 조합이 잘 돼있어 담당 부처 이름에 ‘조합’이 들어갈 정도다. 지역 특산품은 있지만 낙후한 장비 및 기술 탓에 상품성이 떨어져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골 마을과 CSR 대상을 찾는 기업을 하나로 묶어주는 인도네시아 정책이 1촌1품(OVOPㆍOne Village One Product)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람풍주 나립마을에서 생산된 커피 제품. 람풍=고찬유 특파원

여걸조합이 인연을 맺은 곳은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 기업이다. 한국중부발전(KOMIPO) 에너지인도네시아법인은 우리나라 공기업 최초로 OVOP에 동참했다. KOMIPO는 인도네시아에 수력발전소 두 개, 화력발전소 두 개를 운영하고 있다. 현지에 초등학교 세 곳을 지어주기도 했다.

4월 1일 나립마을에선 일종의 혼인식이 열렸다. 신부(여걸조합)를 소개한 KUKM 공무원, 신랑(KOMIPO) 중매를 선 코트라 자카르타 무역관 관계자, 하객으로 온 주민 30여명이 서약서에 서명한 둘을 축복했다. 이어 웃고 떠들며 잔치 음식을 나눴다. 백남희 KOMIPO 현지 법인장은 “바리스타도 보내주고 싶고, 낡은 기계도 바꿔주고 싶고, 열매 선별기계도 사주고 싶고, 뭐든 지원하겠다”라며 혼수 챙기는 부모마냥 흔흔했다.

세계자연기금(WWF) 활동가 인탄씨도 잔치에 왔다. 그는 “불법 커피 재배를 하지 않고, 큰 나무를 베지 않고,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기업 도움으로 농민들의 수익이 늘어난다면 코끼리도 기뻐할 것”이라고 웃었다. “커피들이 올바르게 생산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마을조합의 상급조합 조합원 줄 파르디(50)씨는 “마을 근처가 보호구역이라 경작지가 제한돼 있고 경작방식도 원시적”이라며 “한국 기업이 품질 개선 및 마케팅을 돕고 판로를 열어주리라 믿는다”고 거들었다.

실제 나립마을 부근엔 200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부킷바리산슬라탄국립공원(TNBBS)이 있다. 수마트라의 안데스산맥이라 불린다. 3,568㎢ 열대 우림에 멸종 위기종인 수마트라 호랑이, 수마트라 오랑우탄, 코뿔소, 코끼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수확량을 늘리려 공원 안까지 무단 침범한 커피 재배지 탓에 삶이 위협받고 있다.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10년 내 이들이 멸종될 수 있다는 WWF 보고서도 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람풍주의 해발 800m 지대에 위치한 나립마을 커피밭. 람풍=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는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에 이어 커피 생산량 4위지만 루왁커피를 제외하면 시장 평가가 아직 박하다. 품종과 품질이 떨어진다는 게 이유다. 적절한 투자와 지원을 받지 못한 농민들만의 고군분투도 한몫 했을 것이다. OVOP는 농가와 참여 기업, 호랑이와 코끼리 그리고 인간과 대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으로 이어진 출발선이다. 앞서 밝힌 조합이름이 기억난다면 속삭여도 좋다. “마주 버르사마(함께 전진하자)!”

람풍=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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