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부부가 2011년 3월30일 일본 도호쿠대지진 당시 피해를 입고 도쿄 부도칸에 피난중인 주민들을 만나 무릎을 꿇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 자신으로서 간무 덴노(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달 말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재임기간 한국과의 인연을 자주 언급했던 인물이다. 2001년 68세 생일을 맞아 했던 이 발언은 백제가 일본 왕실 형성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평소 한국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종종 ‘백제의 후손’ 이야기를 꺼냈다.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과거 귀임을 앞둔 주일한국대사가 왕실 초청을 받아 아키히토 일왕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내내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대사는 음반을 틀어놓은 것이려니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옆방 문이 열리더니 십여명의 악단이 실제로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랐단다.

아키히토 일왕은 연주를 마친 악단 앞에서 재차 자신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악단을 향해 “혹시 이중에도 한반도 출신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명이 손을 들고 “제 조상도 1,000년 정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라고 답해 좌중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東北)대지진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당시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피난처로 쓰이고 있는 도쿄(東京)의 부도칸(武道館)을 방문했는데, 일왕은 무릎을 꿇은 반면 피해 주민은 양반 다리를 맞이한 것을 두고 분분한 해석이 이어졌다. 피해 주민의 결례로 결론이 나기는 했지만, 아키히토 일왕이 평소 재해지역이나 양로원 등을 방문해서도 늘 무릎을 꿇고 상대방을 살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패전을 몸소 겪은 터인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생각도 진지했고, 행보도 남달랐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을 합사, 논란이 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재임 기간 단 한차례도 방문하지 않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패전일인 8월15일마다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보내는 동안 무명 전몰자와 일반인 유해를 모신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 전몰자 묘원 참배로 대신했다. 아베 총리가 패전일 기념식에서 역대 총리가 빠뜨리지 않았던 ‘부전의 맹세’를 의도적으로 누락했지만, 아키히토 일왕은 “전후에 길게 이어지는 평화의 세월을 생각하면서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발언으로 대응했다.

중국, 오키나와, 사이판, 팔라우, 필리핀 등 태평양전쟁 격전지를 두루 방문한 것도 우경화하는 정치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짙다. 전쟁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익세력들의 반발도 컸지만, 평화론자들은 헌법상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일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전 메시지로 해석했다.

4선 연임에 집착하는 아베 총리와는 달리 물러나는 방식도 격이 달랐다. 2012년 팔순의 나이에 심장 수술을 받은 그는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왕실 집무를 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으로 판단, 생전 퇴임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

때마침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인 1986년과 1988년 2차례 방한 논의가 진행됐던 사실이 우리 외교부 외교 문서를 통해 공개됐다. 당시는 가족 건강 등의 문제로 무산됐고, 1989년 왕위에 즉위한 뒤로는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탓에 방한이 어려웠을 테다.

이달을 끝으로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시대가 저물고 5월부터는 레이와(令和)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렇다고 그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진 않는다. 86세 고령이긴 하지만 상왕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집무에서 벗어난 만큼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를 복구하는 가교역할로서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일 양국에서 나온다. 재임 초기 그가 남긴 ‘통석(痛惜)의 염”을 뛰어 넘는 묵직한 한마디가 기대된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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