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V리그 여자부 챔프… “날 따르라~ 않고 선수들 성장에 조력”
“유리천장이요? 깰 거면 제가 깨는 게 낫죠.”
박미희(56) 흥국생명 감독은 올해 한국 프로스포츠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여성 지도자 최초로 프로스포츠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박 감독은 1일 열린 프로배구 시상식에선 여성으로는 최초로 감독상까지 거머쥐며 ‘박미희 전성시대’를 열었다. 2일 경기 용인의 흥국생명연수원에서 만난 박 감독은 “어깨는 무겁지만 기분은 좋다”며 “저한테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미희 감독은 1980년대 이름을 날렸던 국가대표 선수였다. 1984년 LA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뛰었고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따기도 했다. 하지만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1991년 28세에 결혼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박 감독은 “지금이야 스물여덟 살은 선수로 한창 때지만 당시엔 30세 넘어서 선수 생활하는 건 생각도 못했다”며 “결혼하면 은퇴하는 것이 당연했던 때”라고 회상했다.
은퇴한 여자 선수가 지도자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꿀 시기였지만, 박 감독은 그 바람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대학 공부를 마치고 국가대표팀 매니저부터 해설위원까지 현장을 지켰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박 감독은 “은퇴 후에 쉬어본 적이 없었다. 코치 경험이 없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계속 현장에 있으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 했다”고 고백했다.
2014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박 감독의 전문성을 눈 여겨 본 흥국생명이 감독 제의를 해온 것이다. 박 감독은 제의를 단번에 수락했다. 여자배구에서는 2010년 조혜정 전 GS칼텍스에 이어 역대 2번째 여자 감독이자, 4대 프로스포츠(축구, 야구, 농구, 배구)에서는 3번째였다.
여성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박 감독은 “예전엔 흥국생명한테 지면 ‘여성 감독’한테 졌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남성 감독들 사이에 있었다”며 “남성 감독들은 같이 술도 마시고 정보 공유도 하는데 나는 보고 배울 롤모델도 없어 고민이 많았다. 새 길을 가는 게 쉽진 않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박 감독은 “가정을 함께 돌보는 게 쉽지 않다. 주위에서 도와줘도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엄마라는 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준 건 역시 가족뿐이었다. 박 감독은 “가끔 딸과 함께 수다도 떨고 함께 여행도 갔다 오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우승한 다음날 집에 들어갔더니 가족들이 ‘통합우승 감독님 오셨네요’라며 만세를 불렀다”고 웃으며 말했다.
박미희 감독은 2016~17 시즌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올해 팀의 12년 만의 통합우승을 이끌며 능력을 스스로 증명했다. 박 감독은 “남성 감독보다 선수 심리를 더 잘 파악하는 게 장점”이라며 “지도자는 선수와 직위만 다를 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나를 따르라고 말하기보다 진심을 다해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감독의 역할”이라며 자신만의 지도 철학을 전했다.
박 감독을 필두로 프로스포츠에서의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바뀌고 있다. 2017년 이도희(51) 감독이 현대건설 사령탑에 부임했다. 박 감독은 “여자배구에 (이)도희랑 저밖에 없으니까 항상 라이벌 구도로 묶더라”라며 “요즘엔 우리끼리 더 힘을 길러야 된다며 여성 감독이 한 명 더 생겨서 3대 3 구도는 돼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 감독을 롤모델로 삼아 지도자를 꿈꾸는 선수들도 많아졌다. 박 감독은 “요즘엔 저한테 와서 “감독님, 저도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생겼다”며 “여건이 녹록지 않지만 관계자들의 생각도 점점 바뀌어 가는 걸 체감하고 있다. 좋은 여성 지도자들이 조만간 늘어날 거라고 본다”고 전했다.
다음 시즌 목표는 당연히 흥국생명의 리그 2연패다. 벌써 지도자 경력 6년 차인 박 감독은 “기록에는 끝이 없으니 여성 감독 최초 우승 다음엔 최초 2연패도 도전해보겠다”면서 “나중에 현장을 떠났을 때도 후배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권현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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