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직업병이 생겼습니다. 지인들의 “한번 보자”는 연락에 나가면 어느새 상담이 진행되는 것이죠. 지난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페에 앉은 지 5시간, 커피를 석 잔이나 마시고 한 잔 더 주문한 참이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데 도무지 요원하다는 친구. 그는 최소요건을 이렇게 설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혼, 확고한 진로, 내 집. 지금 나이쯤엔 당연히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는 그. 소소한 하루에 집중해 행복을 느끼라는 책 구절들은 어쩐지 현실 도피나 자기 세뇌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저도 가지지 못한 것들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야. 동영상이나 하나 같이 봐.”라고 말이죠. 4분이 지난 후, 그는 말했습니다. “이 마성의 할아버지는 뭐지?”
지난주, 제 친구를 포함한 200만명의 이목을 단 3일 만에 집중시킨 어마어마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일명 ‘미쳤어 할아버지’입니다. 포털 사이트 급상승 검색어 차트에서 처음 접한 저는 이게 무슨 뜻일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던 3월이었으니, 또 무슨 사건은 아닐까부터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고 난 후 예상은 200% 빗나갔습니다. 아주 번듯한 차림의 노인 한 분이 대담한 안무를 곁들이며 열창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2008년을 뒤흔들었던 노래, 손담비의 “미쳤어”를 무려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말입니다.
단순히 70대 노인이 이 노래를 불렀다는 ‘소재’만으로 영상은 흥한 걸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수많은 영상이 범람하는 지금, 대중은 어지간히 특이한 소재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독특한 소재도, 무언가 느낀 메시지가 없으면 나만 보고 말 뿐, 쉬이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워진 우리의 시선을 붙잡은 데에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가진 힘이 큰 몫을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영상 속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셨다면 ‘순도 높은 행복감’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실 겁니다. ‘이 나이에 이런다고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혹시 내가 화제가 되진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곡을 부르는 이 몇 분이 오롯이 즐거울 따름입니다. 한 번 본 사람들이 몇 번이고 다시 보는 진짜 이유는 노래 실력이나 춤 실력, 기초생활수급자임에도 봉사하며 사시는 감동적인 사연도 물론 있겠지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그 순도 높은 행복감이, 현대인이 자주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시기, 또 다른 70대 노인도 톱뉴스였습니다. 온 가족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그는 재계에서 유례없던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지요.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지고도 일그러진 얼굴로 살아가야 했던 그와 미쳤어 할아버지. 두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참 많은 상담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젠 행복해지고 싶어요. 제발.” 상담하며 일주일에 5일 이상은 마주하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막을 살펴보면 대부분 ‘못 가진 걸 가지고 싶어요’일 때가 많습니다. 가지고 싶다와 행복해지고 싶다. 비슷한 듯하지만 동의어가 아닌, 그 알 듯 모를 듯한 경계를 우리는 자주 헤매며 삽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도 말이지요. 지금도 그 경계선에서 방향을 잃은 분이 계신다면, 조심스레 묻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두 노인 중 어떤 이의 표정으로 살아가고 싶습니까? 지금 거울 속 내 표정은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그리고 어느 쪽의 얼굴이 내 미래였으면 합니까? 이 질문들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시면 어떨까요?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고민에 대한 답을, 의외로 쉽게 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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