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거리 벽화 그린 이영철 화가
전깃불도 없는 어릴적 김천 고향 풍경과 그리움 담아
어머니가 맺어준 혜민스님과의 인연 덕 뒤늦게 조명
“잔업 작가라고 아세요?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는 작가를 말하죠. ‘잔업 작가’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참 축복이죠.”
이영철(60)화가는 김광석 거리 벽화를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김광석처럼, 웃을 때면 눈가에 주름이 자글한 데도 미소가 해맑다. 그의 작품들도 웃는 표정과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색깔 좋고 예쁜 그림’들이다.
대중에게 알려진 대표작은 대구 중구 대봉동의 김광석 거리에 있는 길이 50m, 폭2m 크기의 김광석 벽화다. 시민들이 사랑하는 김광석의 모습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펼쳐놓았다. 그 작품으로 이영철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KTX를 타고 가다가 잡지를 펼쳤어요. 동료 작가 3명과 함께 그린 벽화가 통으로 나와 있어서 놀랐어요. 시민들이 그 벽화를 많이 좋아해 주셔서 늘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그날 밤 본 절망의 빛
그의 고향은 경북 김천시 봉산면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글쓰기와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어떤 주제가 주어지면 마치 소설을 쓰듯이 장면이 훤히 보였다”고. 처음에는 글쓰기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거짓말을 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면 나쁘지만 즐겁게 하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는 어머니의 조언에 찜찜한 마음을 씻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잘 보였어요. 너무 잘 떠올라서 그땐 병인 줄 알았죠. 근데 그게 장점이더라구요. 한 번 본 장면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더라구요.”
그는 백일장에 나가면 곧잘 장원을 받았다. 글쓰기는 연필만 잡으면 상이 쏟아졌지만, 그림은 기복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림이 더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벽촌에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에게 그림은 그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처음 본 그림은 초등학생이었던 형이 집에 가져온 교과서에 실린 삽화였다. 교과서를 뒤적이며 삽화에 홀딱 반했다.
20살 때는 글에 빠졌다. 좋은 글을 써보겠다는 의지 하나로 부산 감천동 피난민 판자촌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일상이 녹록지 않았다. 외로움과 서러움이 그를 에워쌌다. 너무 눈이 나빠 군대를 면제받았다. 남들이 군대에 있을 때 혼자 방황하며 보냈다.
“한 번은 서면을 지나는데 건물 2층에 있는 화실을 봤어요. 나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이상하게 서러운 마음이 일더라구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얼마 후 짐을 싸서 대구로 갔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대구의 한 미술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서울 유명대학 중퇴라고 학력을 속였다. 그림 실력만큼은 학원에서도 인정을 해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림을 더 배우고 싶었지만 대구에 있는 대학을 갈 수는 없었다. 제자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가려니 성적이 안 됐어요. 대구에 있는 대학은 꿈도 못 꿀 상황이었구요. 그때 안동대가 손을 내밀어줬어요.”
25살,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안동대에 도전했다. 안동대 입학시험을 치던 날 비보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타지에 나와 집안일에 신경을 많이 쓰지도 못했을 뿐더러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대구 자취방으로 오니 전보가 와 있더라구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급히 막차를 타고 김천으로 갔어요.”
늦은 밤, 차가 없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뛰어갔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이 보였다. 절망의 빛이었다.
“마을에 도착했는데 우리 집에만 불이 켜져 있었어요. 빛을 보며 절망감을 느끼긴 처음이었어요. 지금도 한밤중에 우두커니 켜져 있는 불빛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한순간에 집안의 가장이 됐다. 그림으로 먹고 사는 전업 작가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잔업 작가’라고 표현했다. 대학 강의를 비롯해서 사진 촬영, 언론사 기고 등 돈이 되는 일은 무조건 뛰어들었다.
“이것저것 손을 많이 댔어요. 이런 활동들이 저를 성장하게 해준 것 같아요. 가족을 굶기면서까지 그림을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어머니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 엮어준 인연
이 씨의 그림이 지금처럼 밝고 따뜻해진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젊었을 땐 존재의 본질을 치열하게 탐구하느라 그림이 무겁고 어두웠다. 미술이 심오한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이란 신념이 강박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변화의 계기는 어머니의 입원이었다.
“1997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4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어요. 5인실에 어머니 침대는 벽 쪽에 있었지요. 어머니가 전혀 움직이질 못해 답답하실 것 같아 물감 박스에 그림을 그려 어머니가 바라보는 벽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신자인 어머니를 위해 부처를 처음 그렸는데 이후로 꽃, 새 등을 그려서 붙였지요. 밝고 예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도 그 그림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그림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간호사와 환자, 병문안 온 사람들에게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가볍게 그린 그림이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다. 어머니가 퇴원할 무렵까지 그가 그린 그림은 200점이 넘었다. 일상과 그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한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도 어머니였다. 그는 어머니 덕분에 혜민스님을 만났다고 믿고 있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늘 절에서 둘째 아들인 그를 위해 기도했다. 사랑받는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같이 빌었던 것이다.
“2012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절에 갔더니 주지스님이 저에 대해 훤히 알고 계시더라구요. 어머니가 항상 제 이야기를 하신 거죠.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픔을 잊기 위해서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절에 머물면서 개망초꽃 500송이를 그리려 했다. 장례식을 한 날이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서러워서 울고, 그림을 그리다 울고, 매일같이 울었다. 시간이 흐르니 슬픔보다 몸이 힘들고 아팠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좀 더 벌을 주기로 마음먹은 그는 오히려 다행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몸을 힘들게 해서 모든 걸 잊고 싶었어요. 스스로 벌을 더 주자 싶어서 국화꽃 1,000송이를 그렸습니다. 어느 순간 슬픈 것도, 몸이 힘든 것도 모를 정도가 되더라구요.”
완성된 그림을 촬영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런데 그 그림이 혜민스님의 눈에 띄었다.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책의 표지 그림을 찾던 중이었다.
“지역 화가는 수면 위로 나오기가 힘들어요. 그걸 깨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한데, 스님 덕분에 활로가 열린 거죠. 일면식도 없는 스님과 연결이 된 것은 그동안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닿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혜민스님의 책에는 그의 작품 22점이 실렸다. 전국적으로 3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유럽 등 26개국에 번역됐다. 스님을 만난 이후 스스로 위안이 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그림을 위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49재를 하면서 그린 개망초 그림이 애착이 참 많이 가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웠던 그 시절이 참 아름답고 좋았던 것 같아요. 귀한 시간을 한숨으로 허비한 게 아쉽기도 해요.”
그의 그림에는 유독 달이 자주 등장한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과 삶이 우리에게 투영될 때 진정 빛나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늘 열심히 주변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달처럼 주변의 빛을 그러모으고 그 빛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묵묵히 계속해 나가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는 저를 인기 작가라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그저 저와 저의 그림에 대한 인지도가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실에 누운 엄마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앞으로도 묵묵히 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삶의 나머지 일들은 순리에 맡기고 붓 잡을 수 있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작가로서의 소망입니다.”
추종호기자 c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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