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부터 책을 읽었을까?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는데, 책은 무슨” 했고, 주부가 되어서는 책보다도 살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내가 책을 읽을 줄은 몰랐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옛말을 알 것도 같으니, 내가 변한 게다. 어릴 적 친구가 놀라서 묻는다. “너 원래 그랬니?”라고.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다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나도 놀라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다. 심지어 내 모습 중에 이것만은 멋지다고 생각한다. 늦게라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했던 말을 또 하고, 남의 이야기를 내 것처럼 하며, 내 생각이 없는 채로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다. 일상이 단단해지고 마음이 안정된 것도 소득이지만, 무엇보다 제일 기쁘고 흐뭇한 것은 성인이 된 내 아이들에게 ‘어른 같은’ 엄마가 된 것이다.
늘 책을 읽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는데, 어린 눈에도 그 모습은 멋졌다. 그런 아버지가 책을 읽지 않는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상상하면서, 결혼하면 남편과 온갖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아내가 되고 싶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되는지 나는 결국 책을 읽게 되었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의 그 모습은 그리움이 되어 남아 있다.
아이들이 크고 내 시간이 생기면서 비로소 내 인생이 보였다. 남편이 있어도 외로웠고, 아이들이 있어도 헛헛했다. 우울함과 막연함으로 몹시 답답했던 날, 내 손으로 책을 집었다. 내 눈에 들어오고 나를 끌어당기는 책들로 시작했다. 내가 고른 어렵지 않은 책들과 다른 사람이 추천한 어려운 책들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할 주부들을 떠올렸다. 주부문화공간을 열었고, 독서모임을 세 개나 만들어 함께 읽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들의 공로를 인정한다. 내 몸 어딘가에 고스란히 저장해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고, 꺼내주고 싶은 소득이다. 조급해하며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삶을 살라고, 실패해도 웃을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말이다. 누구나 아는 당연한 말들을 내 목소리로 말할 수 있어졌다. 한 발짝 떨어져서 아이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줄 수 있고, 두 팔로 어깨를 감싸줄 수도 있는 엄마가 된 것 같다.
내가 바라는 사람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야깃거리가 많아 흥미로운 사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멋진 사람과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 모르는 것은 가만히 듣고 아는 것은 아는 만큼만 말하는 사람, 소소한 이야기와 진지한 이야기 모두 나눌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맛을 느끼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방과 책상이 생겼다. 아니, 내가 만들었다. 혼자만 내 공간을 갖는 것이 미안해서 남편에게도 권했더니, “온 집이 다 내 방인데” 한다. 하긴, 그는 아무데서나 책을 읽고 아무데서나 일을 한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운동경기를 보면서도 일하니, 방이 따로 필요 없나 보다.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니, 나도 상관없다.
외출할 때도 책을 챙긴다. 기차 안에서는 좌석 앞 테이블 위에 북스탠드를 세워놓고 읽는데, 간간이 메모라도 할라치면 옆 사람이 “작가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오해다. 여행 중 숙소에서, 창문 너머로 새벽을 맞으며, 엉덩이와 등에 쿠션을 받치고, 물 없는 욕조 안에 앉아 책을 읽던 행복은 신선했다. 남편 친구들과 부부동반 여행을 갔을 때, 비행기 안에서 책 읽는 나를 보고 한 여인이 놀라던 일도 있었구나. “모두 피곤하다며 잠을 청하는데, 책을 읽는다”면서, 멋있단다. 흠, 멋 별 거 아니다.
물건은 세일할 때만 사고, 장볼 때도 가격을 살피는 내가 책을 살 때만은 통이 크다. 과감하게 한꺼번에 열 몇 권씩 산다.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고, 먼저 읽은 이에게 빌려도 되지만, 책만은 가격을 따지지 않고 왕창 산다.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곁에 적으며, 읽은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각나면 언제라도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는 자유도 좋다. 늘 어렵다는 출판사 사정도 생각해서니, 잘하는 거 아닌가.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