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전후의 4·3 피해자 7명 재심 추가 신청]
김정추 할머니 “감옥살이 억울… 평생의 비밀 이제야 털어놨어요”
송석진 할아버지 “버스 운전하다 역도로 몰려 개 돼지 취급 당해”
고향 제주를 떠나 인천에 정착한 송순희 할머니가 1958년 찍은 부부 사진. 정반석 기자

올해 1월 제주 4ㆍ3사건에 대한 재심 이후 7명이 추가로 재심 소송 준비에 나서는 것으로 확인됐다. 생존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1차 재심이 마지막 법적 판단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2차 재심의 추진으로 역사의 법정에 공소시효는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됐다.

2차 재심에 참여하는 생존자 대부분은 사건 당시 빨갱이로 낙인이 찍힌 뒤 고향 땅을 버린 이들로 1차 재심의 사실상 무죄 판결에 힘을 얻어 진상규명을 위한 법적 소송에 나섰다. 대부분 내란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강압적인 수사와 절차를 무시한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고 증언했다. 대부분 90세 전후의 고령인 생존자들에게는 71년이 지났지만 풀리지 않는 한으로 남은 4ㆍ3사건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세 딸과 남편, 내 세상을 다 잃었어”

4ㆍ3사건에서 세 딸과 남편을 잃고 인천에 정착한 송순희(84) 할머니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시국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만 되뇌었다. 재심 청구를 한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돼 이젠 억울하지도 않은 것 같다”면서도 “시국이 이러니까, 내 세상을 다 잃어 버렸어, 그게 억울하다”고 했다.

송 할머니의 비극은 남편이 출장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던 194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은 불타고 군경의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자 송 할머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냇가 옆 동굴에 숨었다가 군경에 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서귀포경찰서에서 임신 3개월이던 송 할머니는 “산에 몇 가마의 쌀을 실어 날랐는지 바른대로 대라”는 추궁과 함께 모진 구타를 당했다. 얼마 뒤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 회부된 송 할머니는 내란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동굴에 숨어있다가 잡혀온 주민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이름과 형량만 불러주는 식의 엉터리 재판이었다. 송 할머니는 죄명도 모른 채 전주 형무소에 수감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경에게 다리를 얻어맞은 둘째 아이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송 할머니는 10개월 만에 석방돼 제주를 찾았지만 가정이 풍비박산 난 뒤였다. 남편은 여전히 행방불명이었고 감옥에서 낳은 셋째는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떴다. 의지할 데를 잃은 송 할머니는 시댁의 권유로 재혼을 했고 인천에 새 터를 마련했다. 뒤늦게 만난 전 남편은 “우리가 시국을 잘못 만나 헤어졌다”는 말을 남기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고 재혼한 남편마저 눈을 감았다. 송 할머니는 4ㆍ3사건 때문에 자신의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송 할머니의 아픈 기억은 4ㆍ3도민연대 조사연구원이자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란씨의 시 ’벚꽃이 피면’ 에 생생히 담겨 있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치던 어느 겨울 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제주 4.3 당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송순희(왼쪽) 할머니가 2월 26일 인천 연수구 자택에서 4.3도민연대 수형자 실태조사를 받는 도중 책 ‘늑인’에 담긴 옛 사진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정반석 기자
◇“제주에선 못 살겠다, 도망치듯 떠났어”

4ㆍ3사건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남로당 간부가 됐다는 김정추(88) 할머니는 “시골 처녀가 아무 이유 없이 감옥에 끌려간 것이 아직도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고 재심 신청 이유를 설명했다. “도대체 누가 왜 그런 가혹한 운명을 강요했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게 김 할머니가 역사의 법정에 호소하는 이유다.

김 할머니는 열여섯이던 1947년 동네 주민이 “육지에서 물질하게 해 주겠다”면서 건넨 종이에 지장을 찍은 게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해녀 모집 원서인줄 알았던 신청서는 남조선노동당 가입문서였다. 김 할머니는 졸지에 ‘남로당 선전부장’으로 몰려 서귀포경찰서로 끌려갔고 군법회의 재판에서 내란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전주 형무소에서 10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죄인이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그 시대에 여자가 감옥에 다녀왔다고 하면 좋게 보지 않았다”면서 “내 자신이 부끄럽고 어처구니가 없는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 집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몇 년 뒤 김 할머니는 “제주에선 못 살겠다”며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했다.

김 할머니는 세상을 뜬 남편과 자녀에게도 아픈 기억을 털어놓지 않다가 지난해 12월 부산을 찾은 4ㆍ3도민연대 조사연구원의 설득에 마음을 열었다. 한 달 뒤 1차 재심 결과를 들은 김 할머니는 “영원히 안고 갈 줄만 알았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날도 있는가 싶었다”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2차 재심 청구를 결심한 김 할머니는 “나 같은 억울한 사람이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48년 5월 방화와 학살을 피해 제주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어린이와 여성들.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4.3진상보고서
◇“개돼지 취급 당했던 과거가 억울해”

제주에서 버스 운전을 하다 역도로 몰린 송석진(95) 할아버지는 “개돼지 취급을 당했던 과거가 억울하다”며 명예회복에 나섰다. 송 할아버지 역시 4ㆍ3사건 당시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갔다가 내란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출소한 송 할아버지는 아예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바지선 하역작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고령의 송 할버지를 대신해 재심을 추진하고 있는 아들 송창기(72)씨는 “아버지가 왜 잡혀갔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른다”면서 “아버지는 아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살다 왔다’며 눈물로 회상하셨다”고 했다. 아들 송씨는 “아버지가 겪은 일이 1차 재심자들이 겪은 일과 다를 것이 뭐 있겠냐”면서 “굳이 재판을 통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방법이 없는지 안타깝다”고 했다.

다만 아들 송씨는 재판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고령인 송 할아버지가 끝내 결과를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이다. 실제로 1차 재심자인 현창용(87) 할아버지가 무죄 취지 판결문을 받은 지 20여일 만에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차 재심을 청구하기로 한 피해자들도 대부분 90세 안팎이어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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