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이 자리에 앉아 가상현실(VR) 기기를 머리에 쓰면 우리나라 전통 시골 봄 풍경이 펼쳐진다. 꽃봉오리에 손을 대면 꽃들이 피어나고, 나비가 손끝에 앉는 영상에 몸을 움찔거리게 된다. 영상이 여름으로 바뀌자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팔을 흔들어 물수제비를 뜨고, 가을엔 반딧불이를 잡는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좀체 감정을 알 수 없었던 치매 노인들의 입가에 미소가 비친다. “선생님, 이거 언제 또 볼 수 있습니까?”
“행복 지수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치매 환자들에게 주로 찾아오는 우울감, 망상, 불면증, 초조함, 폭력성 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환자들을 ‘착한 치매’ 환자로 바꿀 수 있는 거죠. 이 작업에 팀제파의 VR 프로그램은 가장 한국적이고 현실적이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나해리 보바스기념병원 뇌건강센터장)
장준석 대표가 이끌고 있는 팀제파는 치매에 VR 치료법을 적용해 성과를 내고 있는 스타트업이다. 2017년 법무부와 함께 알코올중독치료 VR시스템을 개발했고, 지난해부터는 나해리 센터장과 함께 VR과 혼합현실(MR)을 활용한 단계별 치매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벌써 의미 있는 결실도 내고 있다. 지난달 13일 경기 성남시 보바스기념병원에서 만난 장 대표는 “임상실험 한 달 후 치매 환자들의 뇌파를 측정했더니, 판단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활성화 지표가 의미 있는 수준으로 증가했고, 우울증 척도가 개선됐다”며 “향후 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예비연구를 진행한 뒤 보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치매 환자는 약 74만명으로, 65세 이상의 10.7% 정도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75~85세의 치매 발병률은 25%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치매환자 한 명당 관리비용은 평균 2,054만원. ‘치매 푸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나 센터장은 “노령화 때문에 앞으로 치매 환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며 “경증 단계에서 제대로 치료하거나 훈련하지 않으면 손쓸 수 없는 중증 치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팀제파의 VR 치료 프로그램이 특별한 이유는 목표가 치료 효과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 수준이 정교하지 않지만, 그것도 다 ‘계산된 조악함’이다. 장 대표는 “일반인들은 VR 콘텐츠가 얼마나 리얼한지에 신경쓰지만, 배경이 복잡하면 치료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조밀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 센터장은 “회상 치료는 환자의 젊은 시절 기억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려면 환자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팀제파가 제공하는 1960~70년대 농촌 풍경이나 과거 유행가와 같은 한국적인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팀제파는 치매 진행 단계에 따라 프로그램을 나눈다. 누워 지내야 하는 중증 환자들은 어지러움을 느낄 일이 적기 때문에 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HMD)를 사용하지만, 경증 환자들은 빔 프로젝터와 동작센서를 활용해 환자들이 직접 몸을 움직일 수 있는 MR 기술을 사용한다. 아예 의사소통이 어려운 와병환자의 경우 감정을 판단하기 위해 눈동자 센서나 뇌파 측정 센서를 활용하기도 한다.
VR과 MR 치료법은 5세대(G) 통신이 본격화하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 대표는 “의료 관련 데이터는 와이파이로 전송하는 게 금지돼 있어 그 동안 3G나 LTE로 전송해 왔는데, 속도와 크기 문제로 텍스트 데이터밖에 전송할 수 없었다”면서 “5G 시대가 오면 동영상이나 게임 데이터를 실시간 다른 병원으로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현재 최대 4명까지 함께할 수 있는 게임을 다른 병원과 연계해 한꺼번에 수십 명이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유의미한 데이터를 동영상 형태로 전송할 수도 있다.
다만 팀제파는 의료기기 인증 문제에 직면해 있는 상태다. VR과 MR 소프트웨어는 팀제파가 직접 개발했지만, HMD 하드웨어 자체는 삼성이나 구글 등의 제품을 쓰고 있다. 팀제파가 VR프로그램을 의료기기로 인증받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개발한 장비까지 인증받아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의료기기로 인증받지 못하면 병원 입장에서는 치료 수가 문제 때문에 VR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못한다. 스타트업의 자본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구조다.
현재 팀제파는 대안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에 ‘U(유비쿼터스)-헬스케어 기기’ 승인 신청을 준비 중이다. U-헬스케어란 정보통신기술(ICT)과 의료기술을 융합해 시ㆍ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장비를 말한다. 장 대표는 “하나씩 풀어가다 보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면서 “노인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 팀제파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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