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흔을 넘긴 할머니가 내 진료실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치핵이 튀어나오고 속옷에 변이 묻어 불편하다고 했다. 최근엔 피도 섞여 나오고 변을 참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세 자녀를 출산한 뒤인 40~50년 전부터 증상이 생겼다고 했다. ‘조금 일찍 병원을 찾지 않고 왜 이제야 오셨나?’는 질문에 할머니는 같이 온 따님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정순섭 이대목동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
배출조절 장애로 대변이 찔끔찔끔 새는 변실금(便失禁)은 가족에게도 차마 말하기 쉽지 않은 병이다. 가스가 새는 가벼운 것부터 대변 덩어리가 하루에 몇 차례씩 나오는 증상까지 다양하다. 게다가 변실금 환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줘 대인기피, 우울 증상 등 정신질환까지 유발하기도 한다.
가족에게도 숨기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병원을 찾는 환자가 많다는 게 변실금을 치료하는 전문의들의 전언이다. 나이가 들수록 많이 걸리는 질병 특성상 65세 이상 인구가 전 인구의 14.3%(738만1,000명)나 차지하는 ‘고령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괄약근이 짧고 두께가 얇아 임신ㆍ출산으로 골반저근육이 손상되고 신경이 늘어나 더 많이 발생한다.
분만 시 생긴 괄약근 손상이 가장 많아
미국ㆍ유럽 등의 연구에 따르면 변실금은 전체 성인의 1.4~18.0%, 65세 이상에서 15% 정도가 겪는다. 하지만 국내 변실금 유병률은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65세 이상(738만1,000명) 고령인 가운데 10% 정도가 변실금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변실금은 항문 괄약근이 손상돼 항문을 죄는 기능이 약해지거나, 괄약근을 조절하는 신경에 문제가 생겨 변의(便意)를 뇌에 적절히 전달하지 못해 생긴다.
정순섭 이대목동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여성이 아이를 분만할 때 생긴 괄약근 손상이 가장 많은데, 나이 들어 근력이 약해지면서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치핵ㆍ치루수술 후 괄약근이 손상돼도 생긴다. 당뇨병, 뇌졸중, 뇌종양, 척수 손상, 치매 등이 있어도 발생할 수 있다. 크론병이나 궤양성대장염 등 염증성장질환, 직장탈출증, 직장암 수술을 받은 뒤 나타날 수 있다. 골반에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에도 직장 순응도가 떨어져 변실금이 올 수 있다. 대체로 환자 나이가 많아지면 증세가 심해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60세 이상 고령 환자가 전체 환자의 71.82%나 된다.
식이조절ㆍ약물ㆍ케겔 운동으로 대부분 호전
변실금은 증상ㆍ원인이 매우 다양하므로 의사에게 자세히 알리고 적절한 검사를 받아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부분 식이조절과 지사제(Loperamide) 같은 약물요법, 지지요법, 케겔 운동, 바이오피드백 치료 등 비침습적 치료만으로도 호전된다.
식이조절로는 시간에 정해놓고 변을 보고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과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 변비ㆍ설사를 예방하는 것이다. 설사를 일으키는 자극적이고 매운 음식과 커피ㆍ맥주ㆍ우유ㆍ귤ㆍ견과류 등도 삼가야 한다.
지지요법은 환자를 이해하고 위로해 적응능력을 높이는 일종의 정신요법이다. 분만ㆍ수술 등 과거 병력 청취와 배변ㆍ변실금 횟수 등을 자세히 듣고 정해진 시간에 배변하기 등 증상 완화를 위한 생활 방식을 유도하는 치료법이다.
케겔 운동은 골반 근육을 하루 50~100번 정도 조이고 이완하기를 반복해 괄약근을 강화하는 것이다.
바이오피드백 치료는 항문 내 근육 압력과 복압을 측정하는 센서와 모니터를 활용해 변이 직장(直腸)에 있을 때 느끼는 꽉 찬 느낌과 괄약근과 골반근육을 조절해 배변 기능을 교정하는 치료다. 배변을 조절하는 골반과 괄약근이 수축ㆍ이완하는 과정을 모니터로 환자가 직접 보고 들으며 스스로 조절 기능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ㆍ유럽 등에서 많이 시행하는데, 부작용이 없고 효과도 뛰어나다. 조현민 성빈센트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대한대장항문학회 직장항문생리연구회장)는 “건강보험 수가가 낮아 국내에서는 일부 대형병원이나 전문병원에서만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증상이 심각하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끊어진 괄약근을 복원하는 괄약근 성형술(자가 횡문근이나 장을 이용함), 주사요법, 인공 괄약근 삽입, 천추신경자극술 등과 같은 치료로 증상이 호전되기 때문이다. 분만 등으로 괄약근이 손상됐다면 초기에 수술하는 게 좋다.
한편 대한대장항문학회는 5일 개최하는 제52차 춘계 학술대회에서 변실금 토론회를 마련하는 등 환자를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이우용 대장항문학회 이사장(삼성서울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은 “변실금은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못할 정도로 숨기고 싶은 병이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는 환자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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