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국무부는 ‘아프가니스탄 평화협상’ 미국 특사를 맡고 있는 잘메이 할릴자드가 이날부터 다음달 10일까지 아프간을 포함, 영국ㆍ벨기에ㆍ파키스탄ㆍ카타르 등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9월21일 미 국무부의 아프간 특사로 임명된 할릴자드의 해외 순방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이 가운데, 두 차례는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위한 순방이었다. 올해 1월 그는 탈레반 정치국 사무소가 있는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 협상팀과 6일간 직접 대면했고,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2일까진 무려 16일간 릴레이 협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할릴자드는 아프간 태생의 미 외교관이다. 2001년 9ㆍ11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국(NSA)에 근무하며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관여하던 그가 이제 탈레반과 직접 만나서 평화협상의 수장 역할을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탈레반과 미국이 직접 협상에 나서는 장면은 북한과 미국이 회담을 갖는 것만큼이나 역사적 사건이다. 한반도가 장기간 휴전 상태에 놓인 미국의 최장기 분쟁지역이라면, 아프간은 군사작전이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최장기 전쟁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 아프간에서 “발을 빼겠다”고 대선 후보 시절부터 말해 왔다.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건 미국의 요구와 필요에 의한 것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런데 이 평화협상에 최근 큰 잡음이 일고 있다. ‘아프간 평화협상’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면서도 정작 아프간 정부는 빠졌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취급하면서 “정당성 없는 정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굳건히 펴 왔다. 아프간에서 서둘러 발을 빼려는 미국은 탈레반과의 협상에 급급해하는 형국이다. 급기야 미국-탈레반 양자 협상에서 배제된 아프간 정부 인사들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선, 지난 14일 아프간 국가안보자문역인 함둘라 모히브는 워싱턴 방문길 중 기자들과의 조찬 회동에서 작정이라도 한 듯 미국의 아프간 특사인 할릴자드를 비난했다. 그는 “할릴자드가 아프간 정부의 정당성을 흠집 내고 약화시키면서 ‘탈레반 띄우기’에 몰입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인데, 그건 평화를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평화프로세스의 구상인 ‘탈레반도 참여하는 과도정부’에서 할릴자드가 요직을 노린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모히브는 계속 이어갔다. 미국과 탈레반이 주로 만나 온 카타르의 아프간 대사도 거들었다. 파이줄라 카타르 대사는 “제3국(미국)이 아프간 영토에서 벌어지는 무장단체 이슈를 두고 협상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이 문제는 아프간 정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못 박았다. 이와 관련, 아프간 전쟁을 상세한 정보에 기반해 강경 논조로 전해 온 미국 웹사이트 ‘롱 워 저널(Long War Journal)’은 모히브의 할릴자드 비판을 두고 “아프간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를 얼마나 불신하는지 잘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모히브의 발언은 미국의 즉각적 분노를 야기했다. 지난 18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데이비드 헤일 국무부 정무차관은 모히브 발언 직후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은 더 이상 국가안보자문역(함둘라 모히브)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러한 일련의 에피소드는 아프간 평화협상이 미국과 탈레반의 양자 협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과 탈레반, 아프간 정부 3자 간의 미묘한 갈등 기류가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할릴자드 특사의 이번 순방이 이를 진화시킬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아프간 수도 카불의 싱크탱크인 ‘아프간분석네트워크(AAN)’도 현재 협상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의 세 당사자 중 한쪽이 제외된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토마스 루티그 AAN 국장은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프간 정부와 미국이 ‘상호비난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시간에 대한 압박감에 비해 진척이 더디자 그에 대한 비난을 아슈라프 가니 정부에 일부 전이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카불 정부 역시 (탈레반의 거부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그들도 향후 (탈레반과의) 대화를 염두에 두고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루티그 국장 지적대로 미국과 탈레반 간 협상은 그에 쏟은 물리적 시간에 비해 느리게 가고 있다. 할릴자드 특사가 다음과 같이 밝힌 네 가지 협상 의제를 보면, 아프간 정부가 배제된 구도 또한 협상 진척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우선 “(알카에다 부류의) 글로벌 테러리스트가 아프간 영토를 이용해 미국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탈레반이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미국의 요구사항이다. 두 번째는 ‘미군철수 문제’인데, 이는 탈레반의 핵심 요구사항이다. 탈레반 협상팀을 이끄는 쉐르 모하마드 압바스 스타니크자이는 심지어 “미군 철수 이후엔 아프간군(軍)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전쟁의 한 당사자인 아프간군의 이해나 존재감을 전혀 고려치 않은 발언이었다. 세 번째는 아프간 당사자들 간 대화(Intra-Afghan Dialogue) 문제다. 아프간 내 다양한 그룹이 동참하는 포괄적 평화프로세스 없이는 정파와 군벌로 완전히 갈려 내전을 치른 1990년대 초반 상황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휴전 문제다. 그러나 이 역시 아프간 정부가 배제된 협상이 지속되는 한, 휴전의 중요 당사자인 아프간군의 몫은 전혀 반영되지 못할 것이다.
할릴자드 특사는 올해 1월 협상에서 이 같은 4개 의제에 대해 “원칙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어 이달 12일까지 계속된 16일간의 2차 협상에선 “대(對) 테러리즘 이슈와 미군 철수에 대한 초안 정도만 합의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아프간 정부가 배제된 채 나온 초안의 실효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할릴자드 특사는 지난 12일 협상 직후 올린 트위터 글타래를 통해 “미군 철수 타임 테이블과 효율적인 대테러 조치가 완성되는 대로,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를 포함한 아프간인들 간의 협상도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가 빠진 협상은 전쟁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아프간 사회, 시민들에게 이미 ‘소외감’을 안겨 줬다. 미 전투병이 대거 철수한 2015년 이래 아프간 전쟁에서 전사한 아프간 군ㆍ경은 무려 2만8,000명이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군 전사자는 62명이다. 지난해 아프간 전쟁으로 숨진 아프간 민간인은 3,804명(유엔 통계)이다. 전쟁의 피해와 사상자는 아프간 시민과 군인 등 아프간 사회의 몫으로 남아 있다. 평화협상 과정에서 배제되는 현 상황을 아프간 정부나 시민들이 좀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다.
탈레반 입장에선 미국과 일대일로 마주 앉은 지금의 협상 방식이 유리하다. 18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적어도 ‘패하진 않았다’는 점을 과시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탈레반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꼿꼿이 유지하며 협상에 적극 나서겠다는 전략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카타르에서의 첫 대면 협상을 앞두고 할릴자드 특사가 카불을 방문하던 1월 15일, 탈레반은 텔레그램 메신저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아프간 이슬라믹 에미레이트(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ㆍ탈레반 스스로 ‘국가’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일컫는 이름ㆍ이하 ‘IEA’)의 목표는 분명하고 정당하다. 우리는 모국의 독립과 이슬람 시스템 수립을 위해 20년간 외세와 싸워 왔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정치적 해결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도 담았다. “이 목표를 위해 무장투쟁은 물론, 정치적 활동도 병행한다. 정치적 해결을 위해 모든 채널을 열어 놓았으니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 이는 누구든 탈레반 정치국 사무소에 연락하라. IEA는 이를 환영한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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