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단 ‘불순한’ 동기로 철학사를 학습했던 대학생 시절, 유난히도 귀에 박힌 개념이 하나 있었다. ‘판단중지(epoche).’ 현상학을 정립한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이 주장한 방법론으로, “외부세계에 대한 믿음을 중단하는 것”이자 “‘사태 그 자체’로 귀환하는 현상학적 환원을 위한 전제조건”을 뜻한다고 한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먼저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쯤 되겠다.
당시 나에게 후설은 앞서 언급한 불순한 의도에 부합하는 철학자가 아니었다(오히려 정반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의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 노력하진 않았다. 그러나 판단중지라는 개념은 너무나 ‘있어 보이는’ 말이었다. 그래서 꽤나 복잡한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후설을 따라 “그건 일단 괄호를 쳐 두고…” 운운했던 기억이 난다.
지난 24일 윌리엄 바 미국 법무장관의 A4 네 쪽짜리 요약문을 통해 공개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러시아 스캔들’ 수사 결론은 바로 이 판단중지가 핵심이 아닌가 싶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면죄부를 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지만, 뮬러 특검이 자체 판단 없이 ‘빈 칸’으로 남겨둔 부분을 좀 더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 측과 러시아 간 내통 의혹은 제쳐두자. 물론, 엄밀히 말해 “트럼프 대선캠프나 연관 인물이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에 공모ㆍ협력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특검 결론과, “공모는 없었다”는 트럼프 대통령 주장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의 공모’가 없었다면, 그 많은 주변 인사들이 왜 허위진술 혐의로 기소됐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그러나 유죄 입증 책임은 수사기관에 있고, 이는 증거에 달렸는데 특검 결론이 그렇다니 더 이상 문제 삼긴 어렵다.
하지만 당초 본류가 아니었던,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커진 사법방해죄 의혹은 다르다. 뮬러 특검은 보고서에 “대통령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린 건 아니지만, 그가 혐의를 벗었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썼다. 바 법무장관의 설명대로 기소할 사안인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한 것이다. 수사 진행 중이면 모를까, 종결 단계에서 이런 애매한 입장이라니.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자라 해도, 뮬러는 22개월간 사건을 파헤친 수사 책임자 아닌가. 설마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난 모르겠다. 장관이 결정하라’고 한 것일까.
뮬러의 ‘판단중지’에 대한 합리적 추론은 아직 사법방해죄 수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특히 ‘부정한 의도’를 입증해야 하는 이 수사에서 특검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대면조사도 하지 못했다. 이 가정을 전제로 하면, 다른 질문들도 튀어나온다. 뮬러는 왜 여기서 수사를 멈췄을까. 바 장관이 ‘이쯤에서 끝내라’고 지시한 건 아닐까. 올해 2월 취임한 그는 작년 6월, 특검의 사법방해죄 수사를 비판한 적이 있다.
어쨌든 바 장관은 뮬러가 남긴 공백을 ‘무혐의’로 채웠다. 수사보고서를 이틀간 검토한 그는 “수사로 확보된 증거들은 대통령의 사법방해죄 구성에 충분치 않다”고 못 박았다. ‘러시아 공모 무혐의’도 그런 판단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벌써부터 “사법방해죄는 다른 전제 범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는 틀렸다”(대니얼 허멜 시카고대 법학과 교수)는 비판이 나오는 등 이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최근 우리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재수사를 권고한 김학의 전 법무차관 성접대 의혹 사건을 비롯, 과거 검찰의 숱한 부실 수사도 어쩌면 비슷한 경로를 밟았던 건 아닐까. 부담스러운 사건을 맡은 수사팀은 마지못해 판단중지의 결론을 내고, 윗선에 있는 몇몇 ‘정치 검사’가 권력 입맛에 맞는 답을 빈 칸에 채워 넣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겠다. 일선의 젊은 검사들마저 권력 눈치나 보며 수사했다면, 정말로 희망이 없지 않은가.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