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러스트=김경진 기자

저는 21개월 된 첫째를 키우는 임산부(임신 7개월)에요. 아이를 돌보면서 저는 제 부모에게는 받지 못했던 따뜻한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생전 그런 사랑을 받아보질 못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첫째는 동생이 태어날 것을 알아서인지, 자아가 생겨서인지 떼를 많이 씁니다. 그럴 때면 저는 제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차갑고 무서운 부모가 됩니다. 순간적으로 아이를 굴복시키고 싶다는 마음도 들고요. 그럴 때마다 싫어했던 부모와 닮은 제 모습이 소름끼쳐요. 그러다가도 아이가 고분고분할 때는 더없이 아이가 소중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다치지는 않을지, 다른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지지는 않을지 자꾸 걱정하게 돼요. 다른 사람들이 아이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려 할 때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돼요.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 “엄마가 너무 유난을 떨어서 아이도 미워 보인다”고 해요.

저희 엄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늘 아프고 힘이 없었어요. 저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저를 비난했어요. 사실 저는 뚱뚱하고, 못생긴 아이였어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죠. 엄마는 그런 저한테 ‘너는 태어나기를 그런 기질로 태어났다’ ‘공부 쪽으로는 어떻게 해도 안 될 거다’란 말을 늘 했어요. 처음에는 그 말이 싫었지만, 자꾸 들으니 저 스스로도 못났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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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다니던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제가 성악에 소질이 있다고 말해주신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저도 성악을 열심히 하고,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빠가 저를 불러 노래를 해보라고 하더니 ‘그 정도 노래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너는 노래에 재능이 없다. 성악은 이제 그만 배워라’고 하셨어요. 크게 상처를 입었어요. 아빠는 매를 들진 않았지만 항상 무섭게 저를 보고, 명령했어요. 사업을 했던 아빠는 항상 저희에게 ‘내 꿈이 가장 중요하고, 그 꿈을 위해서는 가족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이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 아빠가 중국에 2년 정도 나갈 일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편하게 숨쉬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중국에 다녀오신 이후에는 갑자기 ‘앞으로 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하시곤 했어요. 고등학생이었는데도 새벽 3시까지 아빠의 얘기를 들어야 했어요. 6남매 중 막내였던 아빠는 형과 누나가 막내라는 이유로 괴롭혔고, 종처럼 부려먹었고, 바빴던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했던 일을 얘기했어요. 제가 힘든 건 전혀 묻지 않았어요.

엄마도 자신의 불우했던 얘기를 저한테 끊임없이 얘기했어요. 애기를 낳으려고 첩이 됐던 외할머니가 아들을 못 낳아서 쫓겨난 뒤 계모로부터 구박 받은 얘기 등이었어요. 그런 부모님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제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으신 듯해 밉고 슬프고 원망스러웠어요. 결혼해서 독립한 지금도 여전히 부모님과는 어렵고, 힘듭니다.

사실 어렸을 때 불행했던 기억을 접어두고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면서 저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아직도 어린 시절 상처가 틈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이제 곧 태어날 아이와 첫째에게도 훌륭한 부모가 되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합니다.

김나영(가명ㆍ30ㆍ프리랜서)

나영씨, 사연을 듣고 당신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봤어요. 순하지만, 기가 죽어 있는 듯한 모습이 떠올랐어요. 어렸을 적부터 당신은 기질이 순하고, 약간 느릿느릿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무엇인가를 익히고,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어딘가 부족한 아이가 아니라,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아이였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의 아버지는 반대였을 듯하네요. 타고난 특성이 세고 강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무슨 일에든 반응도 굉장히 빠르고, 감정기복도 심하고, 기질로 표현하자면 엄청 까다로운 유형의 사람인 거죠. 그런 아버지는 당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잘 이해가 안됐을 겁니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이의 생물학적 특성에 맞춰서 아이를 키워야 해요. 배우는데 시간이 좀 걸리고, 느리면 ‘천천히 해도 돼’ ‘여러 번 하다 보면 괜찮아져’라고 토닥토닥해주면서 기다려줘야 해요. 그런데 나영씨의 아버지는 전혀 그렇게 하질 않았고, 자기 특성대로 자식을 대했어요. 오히려 ‘네가 나를 이해하고, 나한테 맞춰’라고 얘기했지요. 나영씨에게 ‘성악을 그만해라’라고 명령하고, 새벽 3시까지 나영씨를 앉혀놓고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그런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지요.

성악은 나영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을 거에요. 그런데 독재적인 아버지가 느닷없이 그냥 싹둑 잘라버렸어요. 나영씨의 아버지뿐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재능도 없는 아이에게 일찌감치 돈을 들여서 음대를 보내봤자, 나중에 먹고 살기 힘들게 뻔하니까”라고 지나치게 예단해 결정하는 잘못을 저지르지요. 자식을 키울 때는 격려와 지지를 해주고, 무엇인가 배우는 과정에서 관심을 보여주고, 열심히 한다고 할 때에는 도움을 주고, 정말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함께 의논하고, 안타까워하고,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아이의 전공이나 미래를 정해주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 아니지요. 그런데 나영씨의 아버지는 이런 역할은커녕 나영씨를 반대로 키웠어요. 아버지의 양육 태도는 굉장히 독재적이고, 지시적이고, 요구적이고, 강요적인 거죠. 그런 아버지 밑에서 나영씨는 얼마나 기가 죽고, 힘들고, 무력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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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어머니는 존재감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주도권을 가지고, 가정 내에서 군림하고 지배적이다 보니 어머니는 몸도 아픈데다, 약자였고, 숨죽여 있어야만 했겠지요. 너무 약해서 자녀들의 성장과정에서 최소한의 보호도 못해줬어요. 아버지가 그랬다면 어머니는 온기로 자녀들을 품어주었어야 나영씨가 상처를 덜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도 차갑고, 자녀들에게 ‘네가 날 좀 이해해달라’고 요구만 했어요. 나영씨는 불행히도 온기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어요. 가정에서 유머나 위트, 재미, 여유 등을 나누지도 못했어요. 두드려 맞거나, 밥을 굶진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차가운 겨울왕국 같은 곳에서 살아온 것 같아요.

그런 척박하고 차가운 가정 환경은 지금도 당신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21개월 첫째는 훈육이 필요한 나이가 아니에요. 떼를 쓰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밥 먹다가 숟가락을 던지기도 하지요. 당연히 아이를 돌볼 때 힘이 듭니다. 그럴 때에는 아이를 윽박지르거나, 소리지르지 말고, 숟가락 대신 던져도 되는 것을 쥐어주거나, 대체로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게 놔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시기에는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모험을 하는 발달 단계이기 때문이에요. 그나마 말귀를 좀 알아들으면 ‘안 되는 거야’라고 부드럽게 말하는 정도면 좋아요.

훈육은 말귀를 잘 알아듣고, 엄마아빠의 사랑이 마음 안에 잘 간직돼 부모가 없어도 부모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고, 안정감을 생각할 수 있는 36개월 이후에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아이가 버릇 없는 행동을 했을 때 순간적으로 화가 나고, 그러면서도 아이가 다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는 상반된 태도는 어렸을 적 당신의 부모가 했던 행동이 순간순간 떠오르기 때문일 거예요. 예를 들면 남편이 아이를 살짝 혼을 내도, 당신은 당신을 혼냈던 아버지가 떠오르고, 당신이 순간 화가 날 때에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거지요. 하지만 나영씨, 당신은 당신의 부모가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의 부모와 전혀 다른 사람이고, 남편도 아마 당신의 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일 거예요. 당신의 글에서 ‘남편과 대화를 많이 나눈다’고 했던 것처럼 아마 당신은 남편과는 대화도 많이 하고, 마음이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괜찮을 겁니다. 당신의 부모를 닮을까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에게 끼친 부모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그들의 그림자가 당신의 삶에 드리워져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부모를 닮은 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엄마처럼 건강이 나쁘지도 않고, 차갑고 냉정한 사람도 아니에요. 당신의 아버지처럼 무섭고 아이들을 지배하지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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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질 때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이해합니다. 왜냐면 당신 부모의 일방적이고 뭔가를 요구하는 식 양육 태도 때문에 당신은 안전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소수(아마도 남편)를 제외하고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극히 꺼려하기 때문이지요. 당신 아버지의 영향이 너무 세고 커서 삶에 과도하게 영향을 주게 됐어요. 외부 자극에 대해 해롭지 않더라도 예민해져 아예 차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 같아요. 그럴 때는 스스로 잠깐 멈추고, ‘(다른 사람이 아이를 만지는 게) 해로운 행동인가, 해롭지 않은가’를 자문해보고, 해롭지 않다면 ‘귀여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만 예뻐해 주세요’라고 재미있고 귀엽게 얘기하는 법을 조금씩 노력해보세요. 이건 앞으로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니 연습을 하는 게 좋아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날 때는 나영씨만의 선을 정하고 만나는 게 좋아요. ‘내가 여기까지 견딜 수 있다’라는 선을 정해놓고 경계를 넘는 상황이 생기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도록 하세요. 속절없이 무력하게 있지 말고 자신이 결정하고, 주도적으로 사는 노력을 해보세요. 그래야 아버지의 그림자를 당신의 삶에서 걷어낼 수 있을 거예요.

나영씨, 지금 남편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나요. 딸과 함께 눈을 맞췄을 때 햇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주위가 따뜻한가요. 당신의 딸이 당신을 소리 내어 웃게 만드나요. 당신의 남편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나요.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행복한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렇게 마음이 통하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관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곧 태어날 둘째에게도 따뜻한 부모가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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