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한국고양이수의사회장
“수의사인 형부가 잘 좀 키워주세요.”
1995년 어느 날, 같이 살던 반려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며 처제가 불쑥 데려온 생후 8개월 가량의 페르시안 품종 암컷고양이 1마리를 덥석 입양하게 된 것이 첫 만남이었다. 사회에선 길고양이보다 도둑고양이란 표현이 더 많이 통용될 만큼 고양이에 대해 부정적 편견이 많을 때였고, 개인적으로도 고양이보다 개를 훨씬 좋아해 고양이를 키울 마음의 준비도 안 됐던 상황. 하지만 그 ‘아깽이(새끼 고양이를 귀엽게 부르는 말)’는 현재 국내 최장수 고양이로 자랐다.
‘어쩌다 집사’가 된 후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지면서 길고양이 삶에 관심을 갖게 됐고, 고양이 전문병원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수의사 김재영(57)씨. 그는 “솔직히 밍키와 서로 이리도 긴 연을 갖게 될지 몰랐다”며 “나중에 고양이 판 ‘워낭소리’ 같은 영화 하나 찍어보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했다.
◇고양이 장수의 비결이 궁금해요
밍키는 올해로 26살이다. ‘사람 1년=고양이 4~5년’이라는 일반적인 계산법으로 따지면 사람 나이로 무려 130살 정도가 된다. 이 때문에 밍키는 사실상 국내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고양이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밍키는 김씨가 서울 중랑구에서 1991년부터 28년째 운영하고 있는 ‘태능 고양이 전문 동물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2017년 일반 동물병원에서 고양이 전문병원으로 병원 운영 방식을 바꾸고 난 후로는 병원의 마스코트 역할까지 톡톡히 한다. 밍키는 샤론과 티몬 등 병원에서 함께 생활하는 다른 고양이 4마리와 크게는 20년 넘게 나이 차가 나지만, 서로 어울려가며 잘 지낸다. 특히 원장실 근처에 자신의 집무실(?)을 두고 새끼 유기묘 같이 안쓰러운 고양이 환자가 내원하면 어찌 알았는지 빈 젖을 물리거나, 혀 혹은 발로 털을 다듬고 손질하는 ‘그루밍’도 해준단다.
김씨는 밍키가 26년 묘생(猫生) 동안 중성화수술 외에는 수술이라고 할 만한 외과 치료를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나이에 비해 아주 건강하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용품점과 3층 병원을 곧잘 알아서 왔다갔다할 정도로 나이에 비해 활동성도 왕성하다. 얼마 전엔 병원이 북적거리는 틈을 타 엘리베이터를 타고 평소와 달리 7층까지 올라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뒤늦게 발견돼 병원을 발칵 뒤집어놨을 만큼 호기심도 여전히 많다. “노화로 잠이 늘거나 기력이 쇠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2005년 38살로 세상을 떠나 고양이 최장수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는 ‘크림 퍼프’(Creme Puff)만큼이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밍키를 반려하겠다”고 김씨는 다짐했다.
고양이의 평균 수명은 집고양이는 15년, 길고양이는 3~5년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김씨는 밍키의 장수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꽤 자주 받는다. 그러나 대답은 항상 같다. “밍키는 본래 타고난 성격이 낙천적이고 호기심이 왕성해 스트레스를 매우 적게 받는 것 같다. 적게 먹고 충분한 수분 공급을 받는 건 살면서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반 고양이는 매우 예민한 탓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질병 발생률이 크게 높아지고, 비만할수록 고양이 건강에 좋지 않은데 밍키는 장수 요건을 잘 갖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길고양이도 생태계의 구성원
길고양이를 포획(Trap)해 중성화(Neuter)한 뒤 제자리에 방사(Return)하는 ‘TNR’은 중성화를 통해 인도적으로 길고양이 개체수를 조절하는 사업이다. 2007년부터 서울시가 동물보호정책 가운데 하나로 채택한 후 현재까지 25개 자치구 전역에서 진행 중인데, 김씨는 2005년부터 서울시에 TNR사업을 제안했다.
그는 “당시 일부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예산문제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2006년 봄 서울 용산에서 발생한 ‘한강맨션 길고양이 사건’이 사회 이슈가 되자, 서울시가 이듬해부터 TNR사업을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한강맨션 사건이란 길고양이들이 지하 전기시설을 건드려 정전사고를 일으키고 악취를 풍긴다며 아파트운영위가 지하실 철문 9곳을 용접하고 주변에 덫을 놓자, 캣맘들이 반발하며 갈등을 빚은 사건을 말한다. 한강맨션사건은 우리 사회가 길고양이를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게 된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김씨가 길고양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에 병원 인근에 위치한 서울여대 학생들이 돌봐주던 생후 1개월 가량 길고양이를 치료하게 됐는데, 많이 아프던 고양이가 살아나자 학생들이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봤다”는 그는 “그때부터 길고양이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TNR이 시행된 지 11년 째인 올해부턴 군집TNR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진행하고 있다. 길고양이 개체 수 조절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정 지역 내에서 75% 이상 개체를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중성화하는 군집TNR을 지난 2월부터 서울 중랑구에서 시작한 것이다. 현재 한국고양이수의사회 회장인 김씨는 앞으로 군집TNR을 고양이수의사회 주요 활동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는 “2012년 4월 한국고양이수의사회를 발족할 때만해도 예닐곱에 불과했던 회원 수가 지금은 1,300명에 이른다”며 “이제 지자체들이 나서준다면 저희가 본격적으로 군집TNR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예상했다.
◇모든 고양이의 건강을 빌며
진료활동과 군집TNR 봉사활동 등 바쁜 와중에도 김씨는 최근 ‘반려묘 증상 상식 사전’ 집필을 마치고 다음달 정식 발간을 앞두고 있다. 사전에는 반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반려묘의 발병 초기 증상을 빠르게 알아채 병원에 데려갈 수 있도록 돕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발병을 암시하지만 반려인 입장에서는 지나치기 쉬운 고양이의 행동과 비교적 보호자들이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발병 증상,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생하는 질병 18가지 등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반려인들이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데려왔을 때 이미 병세가 크게 악화된 상태가 많은 점이 안타까워 발병 초기에 나타나는 증상들을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집필에 참여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서울대 수의과 학생들로 구성된 ‘우주와 아이’라는 단체가 온라인에서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투자 받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이번 사전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동참했다”고 밝혔다.
고양이가 반려동물로서 동물병원을 찾기 시작한 게 2000년대 들어서인데, 지금은 개만큼이나 많이 키우는 반려동물이 됐을 만큼 국내에서 반려동물로서의 입지를 아주 빠르게 굳히고 있다. 그러나 우려도 있다. 그는 “잡식동물인 개와 육식동물인 고양이가 근본부터 다른 만큼 고양이를 ‘조금 다르게 생긴 개’처럼 인식하지 말고, 고양이만의 특성을 이해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동그람이 이태무 팀장 snatafe29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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