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이 27일 “회사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소송비를 대납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검찰 수사단계에서 제출한 자수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이 전 부회장이 법정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증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정준영) 심리로 열린 이 전 대통령 항소심 공판의 쟁점은 삼성이 다스의 미국 소송 비용을 대납했는지 여부였다. 이 전 부회장은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이 전 대통령의 요청과 이 회장의 승인을 거쳐 뇌물을 제공했다고 자백했고, 1심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삼성이 대납한 소송비 중 61억여원을 뇌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 전 부회장은 지금까지 증인 출석을 거부하다가 최근 법원이 구인장 등으로 압박하자 법정에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가 가림막 등의 시설이 필요한지를 물었지만 “괜찮다”고 답한 이 전 부회장은 담담하게 진술을 이어갔다. 그는 “2007년 미국 로펌 에이킨검프 소속 김석한 변호사가 대통령 후보의 미국 소송비 대납을 요청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보고했다”고 경위를 설명한 뒤 “이후 김 변호사로부터 이 전 대통령이 삼성의 지원을 고맙게 생각한다며 계속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선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내지 청와대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고 요청에 응하면 회사에 여러 가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게 이 전 부회장이 밝힌 소송비 대납의 이유였다.
이에 이 전 대통령 측은 “스토리 자체가 거짓”이라던 과거 주장에서 선회해, 소송비 지원에 이 전 대통령은 무관하다는 점을 피력하는 데 주력했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과거 정치자금처럼 직접 대통령에게 돈을 준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에이킨검프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 전 대통령에게 도움될 것이라고 생각했느냐”고 거듭 물었다. 그러나 이 전 부회장은 “김 변호사가 이 전 대통령과 김백준 당시 청와대 총무기획관을 만났다고 해서 그 요청에 따르면 결국 이 전 대통령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검찰에서 밝힌 입장을 고수했다.
이날 검찰 측은 이건희 회장을 위한 ‘원포인트 특별사면’ 또는 삼성에 유리한 금산분리 완화 입법 등이 뇌물 대가였는지 여부를 집중 캐물었다. 이에 대해 이 전 부회장은 “특정 사안에 도움을 받으려 했다기보다는 도와주면 회사에 유익하지 않겠나 기대했고, 도움이 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전 대통령은 증인 신문이 진행되는 동안 고개를 꾸벅이며 졸다가 불리한 진술이 쏟아지자 이 전 부회장을 비난하는 입에 올렸다가 경고를 받았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증언 중 ‘미친 X’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고 따졌고, 재판장은 “정확히 듣지는 못했으나 증언 중에 말하면 방해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 전 대통령은 “증인을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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