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탁자책임위 주주권행사분과 ‘조양호 재선임 반대’ 4대 4 맞서
책임투자분과 2명 긴급 참석시켜 전례없는 비밀투표 끝 반대 결론
국민연금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진통의 연속이었다. 같은 안건으로 이틀 연속으로 회의가 열렸고, 전례 없이 무기명 투표가 이뤄졌다. 우여곡절 끝에 재선임 반대 결정이 내려졌지만, 결정 과정의 절차상 문제는 논란으로 남았다.
27일 국민연금에 따르면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책임위)가 25일 오후 이번 사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26일 밤 결론을 내릴 때까지 15시간이 걸렸다. 25일 오후 1차 회의를 열었으나 찬반이 갈려 결정을 하루 연기해야 했고, 결국 이튿날 밤 8시에야 결론이 났다. 수탁자책임위는 26일 회의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주주권행사분과 위원들이 결론을 내지 못하자 책임투자분과 위원(2명)까지 참석하는 전체회의를 열어 표결에 부쳤다. 지난해 9월 수탁자책임위가 처음으로 구성돼 9차례 회의가 열렸지만 의결권 행사 결정에 책임투자분과위 위원들이 참석한 건 처음이다. 무기명 표결도 처음이다.
국민연금에 따르면, 주주권행사분과위(9명)와 책임투자분과위(5명)으로 이뤄진 수탁자책임위는 운영규정상 위원장이 전체 위원회의 심의ㆍ의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전체회의를 열 수 있다. 주주권행사분과위원은 9명이지만, 민주노총의 추천을 받은 이상훈 위원이 대한항공의 주식을 가졌다는 이유로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면서 4대 4로 의견이 맞섰고, 이에 회의단위를 확대했다. 그러나 예정에 없던 일정이라 책임투자분과 위원 총 5명 중 2명만이 회의에 들어왔다. 나머지 3명은 선약을 이유로 불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적으로 조 회장의 이사 재선임 안에 반대 의견을 밝힌 위원은 6명, 중립ㆍ기권 의견을 밝힌 위원은 4명으로 알려졌다. 결국 갑작스럽게 소집된 책임투자분과위원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한 셈이다. 표결에 참여했던 수탁자책임위의 A위원은 “수탁자책임위는 보통 의견조율을 표결보다 우선하지만, 이번 안건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며 “지금까지는 표결을 하더라도 공개된 공간에서 의사를 표현했는데, 이번엔 누가 어떤 의견인지 모르는 상태로 ‘비밀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수탁자책임위 B 위원은 “기존 위원들이 의견을 바꾸지 않아 결국 책임투자분과 위원들이 결정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갑작스러운 소집으로 회의에 참여하게 된 위원들이 해당 안건에 대해 얼마나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이 객관적 기준보다는 조 회장 일가의 갑질 등으로 악화한 여론을 의식해 이뤄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은 지난 21일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현대엘리베이터 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서는 기권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당시 “장기적인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설명했었다. 양준모 교수는 “대한항공은 아시아나와 달리 경영 상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가 개별 기업 경영권에 개입한 것은 정치적인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사회적 책임투자라는 관점에 부합하는 적극적 주주권 행사”라고 반박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