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서울에서 온 편지 
다산의 금정일기에 수록된 이기경의 편지. 정민 교수 제공
 
 ◇매서운 감시의 눈길 속 위로와 격려 

1795년 당시 다산의 동향은 서울 쪽에도 속속 보고가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감시의 눈길도 매서웠다. 9월 24일에 벗 이주신(李周臣)이 다산을 보러 우정 먼 길을 찾아와 위로했다. 그 이튿날에는 장령(掌令) 이일운(李日運, 1732-?)이 다산이 9월 19일에 올린 성주산 이존창 체포 관련 보고를 확인하고, 주변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서울서 내려왔다. 장령은 사헌부의 감찰직이었다.

10월 1일에는 참판 이익운(李益運)의 편지가 도착했다. 앞서 이익운이 임금의 노여움을 받아 흑산도로 귀양 갈 때 다산이 노량진까지 나가 그를 배웅했었다. 지금은 처지가 뒤바뀌어 있었다.

“그대들이 서울을 떠난 뒤로 기괴한 이야기가 변함없이 떠들썩하구려. 하지만 밝으신 임금께서 위에 계시어 철저히 환하게 밝혀 주시니 오직 마땅히 믿어 두려움이 없어야 할 것이오. 뜻밖의 돌아다니는 이야기쯤이야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명승이 눈앞에 있고 보니, 내 생각에 시 주머니가 날마다 가득하지 싶소. 그래도 처량하고 비장한 말은 삼가서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소? 이는 평탄하고 험난함을 차별 없이 보고, 궁함 속에 있을 때 더욱 굳세어지는 도리가 아니라오. 또한 남에게 속이 좁음을 보이는 경계를 범하는 것이니 함께 살피길 바라오.”

이익운은 채제공의 문인이었다. 아마도 이주신이 내려왔을 때 그간 쓴 다산의 시를 가져갔던 모양이다. 다산이 지은 시에 처량하고 비장한 정서가 강하게 드러난 점을 살짝 나무랐다. 군자라면 잘 나갈 때나 역경에 처했을 때나 한결 같아야 마땅하고, 시련 속에서 더욱 굳셈을 보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대가 금정에서 지은 시는 속 좁은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판서 권엄(權𧟓)과 진사 이규진(李奎鎭)도 같은 날 편지를 보내 다산을 응원했다. 다산은 ‘금정일록’에 이 편지들을 수록해 기록으로 남겨 기억했다.

 ◇숨이 막히고 처량한 신세로구나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다산이 지은 시에는 저도 모르게 울분과 답답함이 묻어났다. 처음 금정역에 도착했을 때는, 역루(驛樓)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 막혀 있어 기운을 옥죄는 느낌이 들어 숨이 막혔다. ‘희작절구(戱作絶句)’ 한 수에 그 심경을 담았다.

겹겹의 산 에워싸서 근심 겨운 낯 옥죄니重巒匼帀逼愁顔

갑갑함이 언제나 동이 속에 앉은듯해. 鬱鬱常如坐甕間

어이 해야 번쾌(樊噲)처럼 사나운 자를 얻어安得猛如樊噲者

신발 코로 구봉산을 걷어차서 엎어볼꼬. 靴尖踢倒九峯山

산이 나를 포위하고 가뜩이나 수심 겨운 내 얼굴 앞을 막아 선다. 좁은 항아리 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 숨이 턱턱 막힌다. 특별히 남쪽의 구봉산은 가장 높아서 쳐다만 봐도 기가 넘어갈 지경이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항우의 수하 장수였던 번쾌 같은 장사를 얻어 그의 구두발 끝으로 그 구봉산을 냅다 걷어차 평지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고 썼다. ‘자소(自笑)’에서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자조했다.

우습구나 내 인생 살적도 안 셌는데 自笑吾生鬢未班

태항산 수레 몰며 험한 길 괴롭구나. 太行車轍苦間關

천권 책을 독파하여 대궐에 들어가선破書千卷入金闕

한 칸 집을 사서는 푸른 산에 머물렀지. 買宅一區留碧山

그림자 벗을 삼아 바닷가로 왔는데도形與影隣來海上

이름 따라 비방 생겨 온 세상에 가득하다. 謗隨名至滿人間

누각에서 비를 만나 드높이 누운 것은小樓値雨成高臥

말 기르는 자리라서 종일 한가해서라네. 似是馬曹終日閒

세상길이 어찌 이다지 고단하고 괴로운가. 아직 귀밑머리가 셀 나이도 아닌데, 세상에 가장 험하다는 태항산의 험준한 길을 수레를 몰고 넘어가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살아 왔다. 어렵게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기쁨도 잠시, 죄인의 몸으로 제 그림자를 동무 삼아 멀리 이 바닷가까지 쫓겨 내려왔다. 이름이 조금 높아지는가 싶더니 비방이 곧이어 따라와서, 온 세상에 나를 비방하는 목소리와 손가락질뿐이다. 이곳에서의 내 직분은 고작 말 기르는 일이다. 아무 할 일이 없어 종일 다락 위에 올라 누워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하루의 시간을 죽이며 지낸다. 이익운의 꾸지람을 들어도 쌀만큼 각진 감정이 드러난 시편들이다.

다산의 초상화.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기경의 편지 “1백냥 빌려달라” 

여기서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 하나를 호명해야겠다. 10월 7일에 다산은 뜻밖에도 이기경(李基慶)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기경은 1791년 진산 사건 당시 다산 등을 모함한 죄로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가서 3년만인 1794년 1월에 석방되었다. 그로서는 이승훈 형제의 책략에 걸려 상중(喪中)에 원통한 귀양살이를 해야 했으므로,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의 석방에는 다산의 주선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없는 동안 다산은 그의 집안까지 돌봐 주었다.

1795년 2월 그는 사헌부 지평으로 복귀했다.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떠난 사흘 뒤인 7월 19일에는 정 6품의 간관(諫官)인 정언(正言)으로 승진했다. 인생길의 엇갈림은 늘 이랬다. 이로서 이기경은 칼자루를 다시 손에 쥐었다. 이기경은 편지에서 계절 인사와 간단한 안부를 묻고 나서, 이삼환과 이도명 등과 왕래하며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썼다. 이기경은 다산이 이도명과 한 차례 설전을 벌인 일까지도 이미 손금 보듯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연이 해괴했다.

“아이의 혼사가 바로 10월 26일이라네. 관혼례와 신행 때 쓸 비용을 합쳐 보니 아무리 박하게 해도 1백 냥이 아니고는 손 쓸 수가 없겠네. 우리 집은 올해 유독 흉년이 들어, 자네도 알다시피 웬만한 빚낼 길은 5,6년 이래로 죄 막혀 버렸다네. 해서 어쩔 수 없이 힘든 형편에 놓인 자네에게 죽는 소리를 하게 되었네.”

이기경은 다산에게 뜬금없이 1백 냥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1백 냥이면 당시 서울의 웬만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시일이 촉급해 갑작스레 마련이 어렵겠거든 26일 이후라도 괜찮다고 썼다. 제 자식의 결혼 비용을 적대적 위치에 있던 다산에게 멀리 금정역까지 편지를 보내 통째로 요구했다. 말이 간청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으니 네가 살려면 나의 이 정도 부탁쯤은 들어줘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게다가 이삼환과 이도명의 이름까지 거론했다. 네가 요즘 그쪽에 붙어 살 길을 도모해 보려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다산의 동향은 사소한 일까지 이들 내부에서 공유되고 있었다. 섬칫했다.

금정역이 있던 충남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마을 진입로에 세운 다산사적비(왼쪽)와 여타 금정찰방 공적비. 정민 교수 제공
 ◇한 푼도 못 주겠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라 

느닷없는 이기경의 편지에 다산은 경악하고 격분했다. 이기경의 편지는 돈을 바쳐서라도 내게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굽힐 다산이 아니다. 다산은 이기경에게 답장을 썼다. 문집에 실린 ‘이기경에게 답함(答李基慶)’이 그 글이다. 서두에서 다산은 편지를 읽고 나서 놀라 자빠질 뻔 했다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처럼 이 같은 편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낸 것이 놀랍다는 뜻을 먼저 보였다. 이어 그대는 자존심이 너무 세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이 같은 병폐가 있다면서, 쓰다달다 말도 없이 다짜고짜 큰돈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속내를 물었다. 그러면서 시정잡배처럼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거나 면종복배(面從腹背) 해서 세상의 비방을 자초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다.

“그대나 나나 함께 뉘우침이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도연명이 ‘지난 일은 어쩔 수가 없고, 앞으로는 따를만함을 안다’고 한 말은 참 훌륭합니다. 앞서는 나 또한 한 소년이었고, 남 또한 한 소년이어서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 손발을 함부로 움직였었지요. 당시의 일이야 어찌 족히 이치로 따지겠소이까? (중략) 또한 혹 미적대며 지내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차례로 놀라게 한다면 오늘 이전의 마음 또한 반드시 간직하기 어려울 테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아드님의 혼인이 가까웠으니 진실로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무릇 예법이란 집안 형편에 걸맞아야 하니, 성호 선생께서 남기신 예식이 있습니다. 어찌 군색한 지경에 이르기야 하겠습니까?”

다산은 분을 못 삭이다가 편지를 쓰면서 차츰 결이 가라앉았다. 귀양에서 돌아온 그대나, 좌천되어 쫓겨 온 나나 모두 죄인이니 단지 반성하는 것이 맞다. 지난 1791년의 일은 나도 그때는 어렸고, 이승훈도 젊었던지라 그대에게 실수가 없지 않았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일을 이치로 따져 무엇 하겠는가. 유감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앙금을 풀고 안부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돈은 한 푼도 보내줄 수가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형편에 맞게 간소하게 혼례를 치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기경의 편지는 치졸하고 야비했다. 그는 칼자루를 쥐자마자 궁지에 몰린 다산을 한번 툭 건드렸다. 돈을 내라! 그러면 한번 봐줄지 말지를 생각해 보겠다. 다산은 정면에서 되받았다. 한 푼도 못 주겠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라. 치사하게 굴지 말고. 글은 부드럽게 끝맺었지만 뜻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이기경이 스르렁 먼저 뽑은 칼은 허공만 한번 갈랐다. 다산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악연은 이 일로 인해 더 길고 오래 이어졌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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