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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버닝 코리아

입력
2019.03.27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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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폭군을 꼽으라면 아마 제정로마 시대의 네로 황제가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싶다. 17세에 황위에 오른 네로를 폭군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는 재위 11년차이던 서기 64년 7월 18일에 발생한 로마의 대화재였다고 한다. 도심 광장의 상점에서 시작된 화재는 9일간 계속되며 로마 전역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당시 로마의 14개 지구 중 도심의 10개 지구가 반소 또는 전소되었다고 하니 그 참상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수백 명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인과응보였는지, 대화재 4년 뒤의 반란 때 네로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실제로 화재가 난 것은 아니지만 요즘 한국은 ‘버닝썬’의 불길에 온통 휩싸여 있다. 로마의 대화재만큼이나 버닝썬 사건의 시작은 사소했다. 클럽 손님과 직원 사이의 폭행시비는 곧 각종 성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혐의로 이어졌고 마약투약 및 유통, 탈세, 조직폭력배 연계 등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비리의 결정판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가 한류스타이고 몇몇 인기 연예인들이 연루된 만큼 그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보통 연예계에서 큰 사건이 터지면 다른 정치적인 이슈를 덮기 위한 방패용이 아니냐는 의혹이 많았다. 그러다가 얼마지 않아 다른 뉴스가 원래 사건을 덮곤 했었다. 버닝썬 사건은 좀 달라 보인다. 버닝썬이 한창 세상을 불태우고 있을 때 검찰과거사위원회에서 다루고 있던 ‘김학의 사건’에 다시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 3월14일 국회에 출석해 경찰이 확보한 김학의 사건 관련 동영상이 인물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고 증언해 검찰의 부실수사와 청와대의 무리한 인사를 암시했다. 마약과 성폭행, 권력유착, 부실수사 등의 의혹은 버닝썬 사건과 다른 듯 많이 닮았다. 게다가 오영훈 의원은 두 사건이 유력 연예기획사와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매개로 연결돼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이쯤 되면 김학의 사건은 거의 자동적으로 버닝썬 사건을 끌고 들어온다. 특권층에 의한 성폭력과 검경유착, 사건 축소·은폐라는 패러다임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방사장 사건(한때 장자연 사건이라 불렀던)’도 빼놓을 수 없다. 방사장 사건 또한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조사하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방사장, 김학의, 버닝썬 사건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간의 작명법대로 가히 ‘불타는 방학썬’이라 부를 만하다.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과정이 가장 경이로웠던 경우는 김학의 사건이었다. 멀쩡한 동영상을 보고도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거나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만 문제 삼아 무혐의로 처리했으니 말이다. 지록위마라는 말이 무색할 노릇이다. 동영상은 적어도 지금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이 기록과 나란히 발전해 왔음을 감안하면 감학의 전 차관을 무혐의로 처리한 검찰은 문명파괴자라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식의 문명파괴 행위는 어디서 이미 본 듯한 데자뷔를 불러일으킨다. 지난 2007년 대선 때 당시 이명박 후보의 ‘광운대 동영상’에 대해서도 검찰은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광운대 동영상은 이명박 후보가 이른바 BBK 주가조작 사건의 장본인임을 시인하는 증거였으나 없던 일이 되었다. 선거캠프 대변인은 주어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는 희대의 논평을 남겼다. 지난 2018년 법원은 1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동차 부품회사 다스의 실소유주라 판단하고 관련 혐의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자금의 흐름상 다스의 실소유주가 사실상 BBK의 실소유주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난 10여 년 전에 우리는 주가조작범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때 주어가 없다고 했던 분은 이제 주요 정당의 원내대표가 되어 해방 직후의 반민특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확립된 사실을 억지로 뒤엎고 우기는 못된 버릇은 최근 일부 인사들의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망언으로 이어졌다. 지금 여기서 ‘방학썬’을 둘러싼 악의 고리를 단죄하지 못한다면 10년, 20년 뒤에 더욱 궤멸적인 결과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해서 로봇이니 인공지능이니 뭔가 거창하고 획기적인 기술에만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인류의 문명이 지금까지 작동해 온 기본원리가 과학기술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다시 고민해야 한다. 빅 데이터가 아무리 많이 쌓인들 일부 권력자의 손에 간단히 조작되고 무시된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김학의 사건을 보고 배운 인공지능은 문명의 이기라기보다 흉기에 가까울 것이다.

모친과 아내를 살해한 천하의 폭군이었던 네로 황제도 대화재가 발생하자 신속하고 확실하게 재난에 대처했으며, 기존 도로를 넓히고 건축자재를 규제하는 등 재발방지를 위해 각종 획기적인 조치들을 내놓았다고 한다. ‘방학썬’으로 불타오르는 2019년의 대한민국이 네로보다 못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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