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새 취미로 떠올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주만 공습 후 수세에 몰린 미국. 하지만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해전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뒤집었다. 잠시 휴식기를 맞은 수병들은 전쟁을 잠시 잊은 듯, 갑판에 모여 복싱 시합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전투기의 정비도 한창이다.
#6ㆍ25전쟁이 시작된 1950년 9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검은색 우비를 입은 군인 6명이 초가집 수색을 위해 접근 중이다. 애를 안고 나온 아낙은 짚으로 역은 우비를 입고 출입문 쪽으로 피신해 있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일촉즉발, 잠시 후 벌어질 상황이 궁금하다.
지난 15일 경기 과천시 국립과천과학관 상설전시관 2층에 마련된 덕후전(展)에 2명의 디오라마(Diorama) 작가가 내놓은 작품에 달린 설명이다.
A4 용지 크기 정도에 불과한 작은 작품이었지만 작품 속 인물의 동작이나 모습, 얼굴 표정, 나뭇잎 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됐다. 전쟁에 참전 중인 배가 깨끗할 수 없기에 검게 그을린 모습도 인상 깊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보니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지게 만들면서 관람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엄마와 함께 왔다는 진태호(9)군은 “바다 속에 어뢰가 있어요. 정말 신기하고 멋있다”며 “어뢰가 발사되고 어뢰를 맞은 전함은 검은 연기를 뿜으며 침몰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 같다”고 말했다. 엄마 이원일(37)씨도 “잠수함과 항공모함 등 섬세함이 돋보인다”며 “작품이 굉장히 작은데도 디테일하게 만들어져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디오라마에 관심이 있어 친구들과 함께 왔다는 김민재(23)씨는 연신 ‘대박’을 외쳤다. 그는 “대충 알고는 왔지만 이렇게까지 디테일할 줄은 정말 몰랐다”라며 “작품만 봤는데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했다.
미니어처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세상, 디오라마가 뜨고 있다.
최근 30~40대들 사이에서도 취미생활 중 하나로 급부상할 정도다. 디오라마는 실제 모형을 미니어처 사이즈(35분의 1 크기)로 재구현 하는 작업이다. 창작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역사적 사건이나,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단순히 탱크나 전투기, 전함 등의 모형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해전(海戰) 디오라마 작품을 전시한 이원희 작가는 “처음에는 저도 바다위에 떠 있는 전함 정도 만드는 수준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스토리를 담고 싶어졌다”며 “4~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디오라마를 소재로 삼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이씨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주리 전함과 2차 대전 연합군의 가장 대표적인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 호 등을 디오라마로 표현했다.
거친 파도, 잠수함에서 어뢰가 발사되는 모습, 두 발 중 한 발은 피했지만 남은 한 발에 격침되는 함정 등 실감나게 표현해 냈다. 어뢰 발사하는 장면 구현하는데 만 2년이 걸렸다. 어뢰에 맞아 불과 검은 연기 기둥이 솟구치는 입체감을 살린 디오라마는 현재 이씨 작품 외에는 없을 정도다.
특히 휴식기에 접어든 엔터프라이즈호의 모습을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갑판 위 복싱시합은 실제 당시 기록된 자료를 통해 만든 것이지만 장소만 함정 내부에서 갑판위로 옮겼다. 링 위에 오른 두 명의 수병, 주변을 둘러싸며 목소리를 높이는 선원들. 가까이 다가가 봐야 보이는 얼굴이지만 선수와 관람객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다. 정비중인 비행기의 상태도 모두 달랐다.
이씨는 “창작보다 역사를 토대로 하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고, 그 중에서도 해전을 다루게 됐다”며 “영화와 각종 자료 등을 토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와 함께 전시회에 참여한 전우석 작가(밀리터리 디오라마)도 디테일 면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번에 내놓은 작품들은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한 것들이다. 전씨가 소속된 동호회에만 68명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전씨의 한국전쟁 초가집 수색하는 작품은 국군이 입은 우비의 구김, 앉아 쏴 자세를 취하거나 마루에서 문을 열기 직전의 군인까지 동작이 모두 다르게 표현됐다. 또 노랗게 익은 감나무와 초가집 지붕까지 세세하게 표현했다. 특히 감나무 하나 만드는 데 1주일 이상 걸렸다고 한다. 작품 전체는 2개월 정도 소요됐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 첫 장면을 구현한 작품은 압권이다. 줄 하나에 생사가 달린 병사와 적군의 폭탄에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병사, 이미 죽음을 맞이한 병사 등 당시의 참혹함을 모두 담아냈다. 숲속의 나무와 폭포, 절벽, 술통 등 표현한 것 모두 디테일 그 자체였다.
디오라마를 배운 지 1년 6개월 됐다는 그는 “제 2의 인생을 사는 기분”이라고 했다. 취미를 가져보고자 악기, 골프 등 다양한 것들을 해 봤지만 디오라마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전씨는 “나의 재능을 이제야 찾은 것 같다”며 “디오라마를 만드는 동안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푹 빠지게 된다”고 했다.
그는 취미로 하기에 정말 좋은 것이지만 단순히 봐서 멋있고, 갖고 싶다고 무작정 달려들면 절대로 안 된다고 충고한다.
전씨는 “디오라마는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탱크의 디테일보다 사람 한 명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한 작품 안에 사람 3명 이상이 들어가야 디오라마로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며, 작품을 완성하는 데 최소 2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디오라마의 핵심은 스토리라며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탱크 하나를 만들면서 무엇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탱크가 쏴서 부서진 건물, 주변에 경계를 서는 군인들,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 등을 함께 만드는 식이다.
그는 “하나의 작품에 실제와 얼마나 똑같이 표현하느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모형을 만들어 본 뒤 점차 스토리를 결합시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씨는 마지막으로 “지금 머릿속에 10개 정도의 스토리를 구상 중에 있다”며 “이제 막 찾은 취임이자 제 2의 인생을 준 디오라마를 통해 멋진 인생을 살아보려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