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썬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나는 한 영화를 떠올렸다. 아랫도리를 드러낸 남자들이 벌거벗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손이 아닌 성기를 이용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던 영화다. 또 다른 영화도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대부분은 시체였고 ‘여자 시체’라고 표기됐다. 여성이 등장했으나 사람이 아니었던 이 영화 안과 밖의 장면들은, 이 사회의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돈을 매개로 거래되는 물건이거나 그 자체로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럽에서 약물 강간을 할 수 있고, 약물 강간을 하라며 건넬 수 있고, 건넨 뒤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권력을 확인하고 공고히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거래되는 여성의 몸이 있다.
여성들은 놀란다. 정말 이 모든 것이 지어낸 이야기가, 영화의 과장이 아니었단 말인가? 슬프게도 아니다.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현실은 대체로 영화보다 더 나쁘다. 그래서 버닝썬 사건은 김학의 성범죄 사건, 장자연 사건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 철저하게 수사해야 할 권력유착형 성범죄 사건의 목록이다. 이 사건들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그 중차대함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연예인 나부랭이의 몰카’ 사건에만 정신을 쏟을 때가 아니라, 더 위를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당장 사회면에 있는 최신 사건을 보자. 생활고에 월세도 내지 못했다며 30대 남성이 아내와 아들을 살해했다. 아내와 아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에게 소속된 물건으로 여기기에 가능한 범죄다. 또 한 사건을 보자. 모텔에 불법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설치됐고 각 모텔 방의 모습은 인터넷으로 생중계됐으며 피해자만 1,600명에 이른다. 이들의 사업에서도 역시 여성은 오직 몸으로,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으로서만 존재하며 거리낌 없이 거래됐다. 이제야 구속된, 이 사건의 꼬리에 불과하다는 정준영에게, 그리고 그의 단톡방 친구들에게 불법 촬영물은 한낱 유희였고 피해자 여성은 구경거리였다. 사냥의 포획물이었고, 남성성을 과시하는 데 유용한 전시품이었다. 얼마 전 한 교대의 남학생들이 여성 신입생의 개인 정보를 담은 프레젠테이션 파일까지 만들어 나누어 보는 일이 있었다. 별다른 징계가 없다면 이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승리, 정준영은 국민들의 눈을 가리는 꼬리일 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웹하드 사이트에서 ‘정준영 동영상’을 검색하고 있을 것이며, 걸리지만 않았을 뿐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을 단톡방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대화가 오가고 있을 텐데 말이다.
영화가 과장인 줄 알았듯이, 성매매 업소의 수가 눈만 돌리면 보이는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몇 배는 많다는 기사를 봤을 때도 이럴 줄은 몰랐다. 접대라는 말이 완벽하게 오염된 것을 몰랐고, 강간을 위한 약물이 별다른 제약 없이 거래되고 있는 것을 몰랐으며, 남성들이 불법 영상 속 피해자의 외양을 은어로 삼아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만의 농담을 즐기고 있는 것을 몰랐다. 여성이 몸으로서만, 물건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부의 문제로 여겨야만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권력층 일부, 연예계에서도 아주 일부가 벌이는 파렴치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들과, 시민으로 같은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남성 일반 사이에 선을 긋지 않고, 어떻게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 여성에게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 사회의 유구한 강간 문화를 드러내 보여주는 아주 길고 오래된 사건이다. 한국 사회는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다음으로 갈 수 없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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