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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생전에 왜 묻지 않았을까” 후회가 만든 노명우의 부모님 자서전

입력
2019.03.22 09:00
수정
2019.03.22 18:03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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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8>사회학자 노명우

잇단 부모 죽음 뒤, 대신 자서전 써 책 출간

파묵의 ‘순수 박물관’ 같은 동네책방 주인으로

부모의 자서전을 대신 쓴 사회학자 노명우 아주대 교수를 19일 서울 은평구 ‘니은서점’에서 만났다. 노 교수는 지난해 가을 이 동네 책방을 열었다. 홍인기 기자
부모의 자서전을 대신 쓴 사회학자 노명우 아주대 교수를 19일 서울 은평구 ‘니은서점’에서 만났다. 노 교수는 지난해 가을 이 동네 책방을 열었다. 홍인기 기자

‘노명우’라는 책이 있다. 자식 누구나 그렇듯 예상치 못한 부모의 죽음이 주인공 노명우를 덮쳤다. 아흔의 아버지에게 치매 증상이 온 것이다. 더욱 애처로운 건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였다. 아버지 병수발은 팔순이 다 된 어머니 몫이었다. 끝까지 아버지에게 매인 삶이 아들 노명우는 애처로웠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번엔 어머니에게 폐암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불과 9개월 만이었다. 진단을 받고 5개월이 채 되지 않아 어머니도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인생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늘 내 곁에 있으리란 막연한 자신감이 호기심을 지연시킨 결과였다. 뒤늦은 자각을 한 그가 간신히 남긴 건 아버지 20분, 어머니 10시간짜리 음성 녹음뿐이었다. 부모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근거였다.

그러나 써야 했다. 부모의 인생을. 다행히 그는 사회학자였기에 부모가 살아온 시간을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1920년대부터 2016년까지 시대를 관통해 살다 간 평범하고 평범한 남성, 여성으로서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을 통계와 영화, 기사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모의 자서전을 쓸 수는 없었다. 자서전의 혼, 부모의 심정이 담겨야 했다. 그것을 헤아리려, 그는 부모의 고향부터 통학로, 유랑의 행적까지 좇았다. 산동네와 산 아래의 천지차이에 유년의 어머니가 느꼈을 초라한 동경, 만주 봉천(현재의 중국 선양)에서 ‘모던 보이’를 꿈꿨을 청년의 아버지가 그려졌다. 그렇게 부모의 ‘인생극장’을 탈고했다.

그와 동시에 이 책 노명우의 클라이막스도 시작된다. 기록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부모를 기억하고 싶었다. 부모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생각했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무얼까. 그건 결국 그가 못 다 이룬 꿈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이룬 꿈이 아니라.” 넋을 기린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책방을 열었다. 돈은 충분히 벌었지만, 책은 가까이 하지 못했던 부모를 기억하는 공간. 책은 부모와 자신을 연결하는 매개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책 읽는 저를 보는 걸 좋아했거든요.” 자신의 성씨 자음에서 따온 ‘니은서점’이라는 동네 책방은 그래서 박물관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늘 앉아서 자신을 배웅했던 의자, 가장 좋아했던 모자, 영세를 받던 날 어머니와 함께 한 아버지의 미소가 그곳에 있다.

부모를 기억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니은서점은 동네 사랑방을 꿈꾼다. 이곳에서 동네 사람들은 책 이야기를 하다 처음 본 사람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대학에 들어간 조카에게 선물할 책으로 뭐가 좋을지 북텐더(바텐더처럼 손님에게 적합한 책을 골라주는 니은서점의 직원)에게 긴 상담을 한다.

책 노명우의 절정은 이 서점이 ‘노명우 띠지’를 두른 책 천 권으로 가득 차는 날이 될 듯하다. 노명우 띠지가 뭐냐고? 지금부터 함께 이 책 노명우의 첫 장을 넘기면 알 수 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과 사회를 탐구하는 사회학자인데 정작 왜 부모의 인생에는 호기심을 갖지 않았을까. 부모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그는 후회했다. 홍인기 기자
사람과 사회를 탐구하는 사회학자인데 정작 왜 부모의 인생에는 호기심을 갖지 않았을까. 부모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그는 후회했다. 홍인기 기자

-책을 여러 권 낸 사회학자지만, TV 예능 프로그램 ‘김제동의 톡투유’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더욱 유명해졌죠.

“맞아요. 그런데 원래 TV란 매체는 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여러 번 출연 제의를 고사했었어요. 얼굴이 알려져서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는 것도 싫었고요. 그런데, 출연을 마음 먹은 건 엄마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까지 암에 걸리셨죠. 병원에서는 길면 6개월 사실 거라더군요. 마음이 급했어요. 내가 엄마를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건 무얼까. 정말 세속적이긴 하지만, 엄마는 출세는 곧 TV 출연이라고 믿는 세대였거든요. 종종 ‘너는 언제 TV에 나오니’라고 물으시기도 했고요.”

-그때 제의가 온 건가요?

“어머니가 2016년 6월 초에 돌아가셨는데 그 해 4월 톡투유 제작진한테 연락이 왔죠. 그래서 첫 방송은 보셨어요. 한 번만 보신 게 아니라 보고 또 보고 정말 여러 번 보셨죠. 그래서 두 번째 녹화 때는 방송사에 양해를 구해서 어머니가 녹화 현장에 오실 수 있도록 했어요. 그런데 녹화 전날 어머니가 응급실에 실려가셨고 이틀 뒤에 돌아가셨죠.”

-그 뒤에도 녹화할 때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겠네요.

“그렇죠. 녹화 때마다 그랬어요. 운 적도 있죠. 저와 비슷한 방청객의 사연을 듣다가. 감정을 절제하려고 했는데도 잘 안돼서 눈물이 났어요.”

-왜 부모의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처음에는 한국 고전영화로 부모 세대의 삶을 조명하는 책을 쓰려고 했어요. 학생들에게 한국 근ㆍ현대사를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죠. ‘세상물정극장’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영화를 함께 보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했는데 엄마가 열심히 참석하셨어요. 아주 좋아하셨죠. 아버지 병수발에서 유일하게 해방될 수 있는 외출이기도 했고요. 엄마와 영화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옛날 얘기까지 하게 되면서 책의 기획이 바뀌었죠. 고전영화를 엄마, 아버지 인생과 결부 시켜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처음에는 아버지 자서전을 쓰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엄마마저 병에 걸리셨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인생극장의 주인공을 단독 캐스팅에서 더블 캐스팅으로 바꾼 거죠.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책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어머니가 이 책이 나오면 출간 행사 하는 것까지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자료조사부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단계를 거쳐서 완성했나요?

“증언 녹음은 많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20분 가량. 이미 치매 증상이 오기 시작했을 때라 너무 안타까웠죠. 왜 진작 내가 여쭤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많이 물었고 10시간 정도 녹음을 했죠.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있기도 했고, 또 기억은 흩어져있는 단편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사를 구축하려면 이 조각들을 이어줄 것이 필요했죠. 제가 쓴 자료는 통계였어요. 부모님의 증언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하거나 증언 중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걸 해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게 통계죠.”

일례가 아버지의 일본어 자랑이었다. 평소 “내가 일본말을 잘했어”라고 말하곤 했지만, ‘일제 시대에 태어난 아버지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게 무슨 자랑이지’ 싶었던 거다. 그런데 그가 찾아본 통계는 “1923년 조선에서 일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4.08%에 불과했고, 20년 뒤에도 22.15%였다”고 아버지의 자신감을 뒷받침해줬다.

-거기다 현장 조사도 했죠.

“맞아요. 통계는 굉장히 건조한 자료거든요. 통계는 부모님의 ‘심정’을 말해주지는 못하니까요. 통계로 할 수 있는 건 검증이나 추론뿐이었죠. 그래서 영화나 소설, 수필처럼 그 시대 사람들이 남긴 심정에 대한 기록을 참고했어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도 채울 수 없는 게 있었죠.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청년의 아버지는 어땠는지 여쭤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여행을 간 거예요. 부모님 인생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에.”

◇아버지의 내무반, 어머니의 통학로에 가보니 ‘울컥’

아버지가 징용 갔던 군 내무반, 어머니가 학교를 오가던 통학로에 가보고 나니 물어보지 못해 몰랐던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됐다. 홍인기 기자
아버지가 징용 갔던 군 내무반, 어머니가 학교를 오가던 통학로에 가보고 나니 물어보지 못해 몰랐던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이 이해됐다. 홍인기 기자

-가보니 어땠나요?

“가본 곳 중에 일본 나고야가 있어요. 아버지가 나고야로 징용 가서 군 생활을 하셨거든요. 보병 제6연대 건물이 메이지무라(明治村)라는 테마파크 같은 곳에 복원돼있다는 걸 알고 찾아가봤죠. 환영처럼 일본 군인이 된, 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아버지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울컥 하더군요. 가 보니 아버지 말씀이 이해가 됐어요. 생전에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증언을 하신 게 있거든요. ‘중대장이 굉장히 친절했다’, 그리고 ‘군대 밥이 참 맛있었다’는. 가보니 내무반과 중대장실이 아주 가깝더군요. 내가 경험한 중대장과 사병의 관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당시 군인들이 먹었던 음식도 모형으로 전시를 해놨던데, 돈까스처럼 생긴 게 있더라고요. 일본이 개화 이후 서양식단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고 이를 가장 먼저 장려하고 보급한 게 군대였다는 게 떠올랐어요. 돈까스를 처음 입 안에 넣었을 때 아버지의 심정이 짐작됐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이전에 먹었던 돼지고기 요리와는 전혀 다른 맛. 저도 처음 돈까스를 먹었을 때 황홀했거든요. 아버지에게도 그 기억이 강렬했겠구나 싶었죠. 현장에 가보니 그런 수수께끼가 풀린 거예요.”

-어머니와 관련해선 어디를 가봤나요?

“서울 창신동 산꼭대기 마을. 어머니가 어릴 때 사셨던 곳이죠. 거기서부터 어머니가 다녔던 초등학교까지 통학로를 추정해서 걸었어요. 어머니가 이화장(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집)을 거쳐서 다녔다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그 길에는 경성제대(지금의 대학로)가 있고요. 산동네를 내려오면 고래등 같은 이화장이 있고, 경성제대 학생들이 거리를 오갔겠죠. 어린 소녀가 느꼈을 빈부격차, 기회의 불평등이 느껴졌어요. 어머니는 생각했겠죠. ‘나도 대학생이 되고 싶은데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왜 제 공부 뒷바라지를 그렇게 헌신적으로 하셨는지도 짐작이 됐죠.”

-‘인생극장’을 읽으면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더욱 친밀했던 것 같아요.

“책에서 받는 느낌 그대로예요. 아버지가 유별나게 무뚝뚝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자상한 분은 아니었거든요. 여느 부자지간이 그렇듯 아버지와는 1분 이상 대화를 잘 하지 못했죠. 엄마와는 친했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4남매의 막내였으니까요. 엄마 말을 가장 잘 듣는 자식이었고요.”

-어머니에게 애처로운 마음도 더 깊었겠네요.

“아버지는 하시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았으니까요.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쓰기도 잘 쓰셨죠. 대책 없이 여기저기 빌려주기도 하고요. 그러니 밖에서는 호탕한 사람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그만큼 훌륭한 남편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다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죠.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아버지가 나쁜 건가? 그게 아니라 시대가 만든 한계인 거죠. 그러니 아버지가 밉지 않더라고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경기 파주에 주둔한 미군을 상대로 ‘레인보우 클럽’을, 어머니는 이른바 ‘양공주’의 머리를 해주는 미장원을 운영한 덕에 가정 형편은 넉넉했다. 미군 부대가 철수한 이후 클럽은 ‘무지개홀’로, 미장원은 ‘무지개다방’으로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무지개다방은 일찍이 그가 세상물정을 관찰 할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어쩌면 사회학자가 될 자질이 그곳에서 싹텄는지 모른다. 부모의 자서전을 쓰면서도 그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흔적은 이런 것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충청도 양반 집안’이라는 표현을 간혹 사용하셨지만, 진짜 양반이라면 몸에 배어 있어야 할 유교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반 타령은 자식들이 좀더 잘되기를 기대하며, 남부끄러운 짓 하지 말라는 뜻에서 억지로 찾아낸 근거 같은 것에 불과했다.”

-부모의 자서전을 대신 쓴다면, 냉정하게 기술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런데 저한테는 냉정한 시선으로 쓰는 게 매우 중요했어요. 책으로 내지 않고 혼자 기록하고 볼 목적이었으면 아들의 입장에서 썼겠죠. 그런데 책이라는 미디어는 출간되면 제 품을 떠나는 거잖아요. 독자들에게 못 다한 효도의 회한을 읽어달라고 하는 건 웃기는 일이죠. 부모님의 입장, 아들의 시선, 사회학자로서의 해석이 이 책에 담겨있어요. 사회학자로서는 이전세대의 인생을 기록한다는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쓰면서 힘들었던 건 뭔가요?

“여러 고비가 있었죠. 다른 책을 쓸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쓰면서는 ‘내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과 공포가 있었어요. 부모이긴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쓰는 것이니까요. 내가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잖아요. 과연 남의 인생을 재단하고 평가할 자격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부터 이 대목에 이 단어를 쓰는 게 과언 적절할까 하는 고민까지. 그래서 이 책은 사회학자로서 태도가 바뀌는 분기점이 되기도 했어요.”

-어린 시절엔 어떤 아들이었나요?

“어머니 기억에 따르면, 얌전했고, 참을성이 많았고, 책을 좋아했어요. 형이나 누나들과는 달랐죠. 막내라서 엄마 옆에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면서 엄마가 다른 가족들에 대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푸념을 많이 들어서인 것 같아요. 속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거죠. 엄마의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고 성격이나 외모도 형제 중에 가장 많이 닮았어요.”

-책을 쓰면서 아들이지만 정작 부모의 인생을 잘 몰랐다는 반성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진짜 후회를 많이 했어요. 자식이 가진 못된 습관 중 하나는 아버지는 아버지로 태어났고 엄마는 엄마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버지에게도 사춘기가 있었는데 나는 왜 그걸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나는 엄마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진짜 엄마의 성격이 아니었을 수 있는 거죠. 엄마로 살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지.”

◇표현하지 않으니 ‘무명씨’가 되는 것

그는 부모의 자서전 ‘인생극장’을 다 쓰고 난 뒤 심정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프리 스케이팅을 마쳤을 때의 김연아 선수에 비유했다. 평가에 상관없이 ‘아, 내가 해냈구나’ 하는 감격이다. 홍인기 기자
그는 부모의 자서전 ‘인생극장’을 다 쓰고 난 뒤 심정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프리 스케이팅을 마쳤을 때의 김연아 선수에 비유했다. 평가에 상관없이 ‘아, 내가 해냈구나’ 하는 감격이다. 홍인기 기자

-왜 사회학자가 됐나요?

“고등학교 때는 막연하게 의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고3 때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나와 의사는 맞지 않더라고요. 그러면 어디에 진학해야 하나, 그때 떠오른 게 사회학과였죠. 하지만 이과였기 때문에 교차지원을 하면 손해를 보던 시절이었어요. 건축학과를 넣었다가 떨어졌고 재수를 하면서 문과로 바꿔서 1984년 서강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죠. 가보니 정말 공부가 재미있더라고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 줄 처음 알았어요.”

학부를 마치고 곧장 대학원에 들어갔다. 군 복무를 한 뒤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애초 노동운동을 연구 분야로 택했으나,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 빠져 연구 주제도, 학교도 바꿨다. 주위에서 ‘이제 와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뜯어 말렸지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생 한 번 사는데, 조금 늦어지면 어때. 내 마음을 흔드는 주제로 공부해야지.’ 그렇게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수(아주대 사회학과)이면서도 책을 10여권이나 출간한 대중적인 사회학자이기도 한데요.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사회로부터 고립되면 존재의 이유가 없어져요. 사회를 탐구하는 학문이니까요. 논문은 아카데미 안에서만 유통되지만, 책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 저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미디어예요. 그래서 책을 쓰는 걸 좋아하죠. 제가 롤모델로 여기는 사회학자가 지그문트 바우만인데, 바우만은 죽기 직전까지 책을 썼어요. 저 또한 일흔, 여든이 될 때까지 책을 쓰고 싶죠. 책을 하나 다 쓰고 나면 어떤 심정이 드느냐면, ‘다음 책은 더 잘 쓰겠지’예요. 나이를 먹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도 깊어질 테니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돼요.”

-부모의 자서전을 쓰면서 느낀 건 뭔가요?

“기록의 중요성이죠. 자기 표현의 중요성. 나를 드러내지 않고 죽으면 없는 사람이 돼요. 무명씨가 왜 무명씨인가요? 표현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내가 ‘있는 사람’이 되려면 표현해야 해요. 아무도 나를 대변해주지 않아요.”

-비혼으로 살고 있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도 쓴 적이 있는데, 왜 혼자 사나요?

“가족을 구성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요. 책을 많이 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가족이 없기 때문이죠. 온전히 나의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니까요. (혼자 사는) 현재에 만족하니까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노명우의 순수 박물관, 니은서점

그가 ‘어머니의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가 생전에 집을 나서는 그를 앉아서 바라보곤 했던 의자를 서점 창가에 갖다 놨다. 홍인기 기자
그가 ‘어머니의 의자’에 앉았다. 어머니가 생전에 집을 나서는 그를 앉아서 바라보곤 했던 의자를 서점 창가에 갖다 놨다. 홍인기 기자

지난해 1월 ‘인생극장’을 출간한 이후에 그는 서점까지 냈다. 서울 은평구의 주택가에 있는 작은 책방 ‘니은서점’이다. 원래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라는데, 왜 그는 책방 주인이 됐을까.

-니은서점은 어떤 책방이고, 왜 만든 건가요?

“왜 점점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까 생각해보니 한국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더라고요. 책은 곧 참고서였고 이는 입시 경험과 직결되니까. 동네 책방이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다가 다른 측면으로는 ‘순수 박물관’ 같은 의미도 있고요.”

노벨 문학상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 말이다. 연인의 흔적과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으고 나중에 이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만드는 남자의 이야기다. 실제 파묵은 순수 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부모님을 기억하는 공간이라는 거군요.

“어떻게든 부모님을 기억하고 싶었거든요. 유품을 정리하면서 느낀 건데, 어떤 걸 버리고 어떤 걸 남길지 정말 애매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사람을 기억한다는 건 뭔가 생각했고, 그건 그가 못 다 이룬 꿈을 기억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부모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돈은 벌만큼 버셨고, 아들을 교수로 만드셨으니 자식 교육도 시킬 만큼 시키셨고, 정작 이루지 못한 건 공부였어요. 책이라는 미디어와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고, 그래서 자기를 표현할 방법을 익힐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 서점을 생각했고 또 곳곳에 부모님을 기억할 물건도 갖다 두었죠. 사진이나 의자, 엄마가 아꼈던 그릇, 좋아했던 모자 같은 것들이요.”

-서점은 잘 되나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죠. (웃음) 이제 손님 중에 동네 주민이 절반 정도가 됐어요. 7개월 만에 정말 많이 늘어난 거죠. 이곳이 동네 사랑방이 됐으면 좋겠어요. 작기 때문에 저자 초청 북 토크를 하면 아주 밀도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고요. 책 많은 친구 집 놀러 와서 책 가지고 수다 떨고 새로운 친구도 만드는 편한 공간이 되길 바라죠.”

◇대형서점에는 없는 띠지가 여기 있다

노명우 교수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종이를 접어 띠지를 두른 뒤, 추천 이유를 적고 있다. 니은서점에만 있는 ‘노명우 띠지’다. 홍인기 기자
노명우 교수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종이를 접어 띠지를 두른 뒤, 추천 이유를 적고 있다. 니은서점에만 있는 ‘노명우 띠지’다. 홍인기 기자

-어떤 책을 파나요?

“인문, 사회과학, 예술 분야에서 철저하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 (웃음) 목표가 있어요. 책방을 제가 확실하게 다 읽은 책들로 채우는 거죠. 아마 천 권 정도 들어갈 거예요. 제가 다 읽은 책에는 추천 이유를 쓰고 난이도를 표시한 ‘띠지’를 둘러 놓기 시작했거든요. 한 60권 정도 적어뒀어요. 띠지를 두른 책들로 채우면 주인이 없어도 손님들이 책을 쉽게 고를 수 있겠죠. 게다가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특별한 서점이 될 거예요!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에서 책을 쇼핑하는 시대에 동네 책방이 살아남을 방법이라고 믿어요. 니은서점에는 책방 주인의 추천이 있는 거죠.”

기발한 생각이다. ‘노명우 띠지’라고 이름 붙여도 되겠다. 띠지에 적힌 추천 이유는 다르게 말하면 처방전 같기도 하다. ‘니은서점 단골 손님 작가의 최신작. 혼자 살기 시작한 분에게 꼭 필요한 책’, ‘제목은 약간 클리셰처럼 느껴지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읽고 나니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이 왔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 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강력 추천!’.

-책이란 뭘까요.

“어떤 미디어보다 인류가 축적한 지성의 역사와 정보를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죠. 인터넷에 정보가 많은 것 같지만 그 기반은 책이죠. 그래서 여전히 소중한 미디어예요. 심지어 이 서점의 아이디어도 ‘순수 박물관’이라는 책에서 얻었죠!”

-동네 책방의 존재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요?

“별로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출판계에서 쓰는 말 중에 ‘발견성’이라는 게 있어요. 팔리는 소수의 책은 엄청나게 팔리는 반면, 다른 많은 책들은 나왔는지도 모르는 채 사라지는 ‘올 오어 나씽’(all or nothing)이 된 이유가 발견성에 있다는 거죠. 책이 발견될 기회가 사라진 환경이니까요. 대형 서점에는 유명 저자의 책 위주로 전시되고, 온라인 서점에서는 아예 발견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죠. 그런 시대에 책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동네 책방이에요. 발견성을 지니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하죠. 니은서점에서 파는 책을 인문, 사회과학, 예술 분야로 좁힌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전시돼있는 책의 숫자는 대형 서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분야를 국한하면 거기에 없는 책이 니은서점에는 있죠. 그래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손님들이 ‘어, 이런 책이 있었네요!’ 라고 말할 때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노력한 삶의 도가 있나요?

“제가 교수가 되고, 책을 내고, 방송을 하면서 지명도라는 게 생겼잖아요. 그 뒤부터 생각한 게 있어요. 유명세라는 허상에 빠지지 말자. 저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른바 ‘셀럽’(유명인ㆍcelebrity의 줄임말)이 되기는 싫어요.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과대평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예요. 셀럽에게는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대중이 만들어낸 기대이든, 자신이 가진 능력 이상의 ‘플러스 알파’가 끼어 있으니까요.”

-더욱 소소하게는 뭐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사람을 망치는 게 질투다. (웃음) 질투를 하지 않으려면 경쟁심을 갖지 말아야 하죠. 대신 나의 과거와 경쟁하려고 해요.”

노명우라는 책을 덮고 나니, 책이 남았다. 책이라는 아날로그의 순수가, 노명우 자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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