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비핵화’ 등 북한 추상적 표현 탓 하노이 회담 결렬
미국에 핵 무기ㆍ프로그램 폐기로 비핵화 범위 좁히도록 설득
지난달 말 정상 간 하노이 비핵화 담판이 결렬된 뒤 신경전 중인 북미를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우리 정부 ‘촉진 전략’의 윤곽이 잡혔다. 일단 목표부터 일치시키는 게 과제다. 북한에는 ‘구체화’를, 미국을 상대로는 비핵화 범위의 축소를 각각 설득할 전망이다.
정부 소식통은 20일 “최근 북미 대화 촉진 방안의 큰 틀을 마련한 청와대가 현재 외교부와 구체적 사항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도 “하노이 회담 결과 복기가 끝났고 이제 촉진자로 본격 나서야 할 시점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 이라며 “북미 모두 대화 모멘텀(동력)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가설을 밑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했다.
가장 큰 정부의 골칫거리는 협상으로 북미가 성취하려는 목표조차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외교부는 18일 국회 외교통일위 업무보고에서 비핵화 정의에 대한 합의 실패를 하노이 회담 결렬의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다른 정부 소식통은 “비핵화 ‘엔드스테이트’(end-stateㆍ최종 상태) 개념을 북미가 공유하고 있다’고 청와대가 밝혔지만 현재 북한은 엔드스테이트 설정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지난해 초 대화 국면 진입 뒤 줄곧 북한이 동의한 비핵화 개념은 ‘완전한 비핵화’나 ‘핵 무기 없는 한반도’ 같은 추상적 수준의 표현에 머물러 있다. 17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가 필요하다고 한 이유다. 연구 논문에 더러 등장하는 이 말은 현상을 객관화하기 위해 측정 가능한 개념으로 규정하는 일을 뜻한다.
그러나 돌연 문턱을 높여버린 미국에게도 합의 무산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게 우리 정부의 인식이다. 미국이 하노이 회담 당시 북한에게 폐기 대상으로 제시한 생화학 무기 등 일부 대량살상무기(WMD)는 여태껏 남북 또는 북미 간 비핵화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남북)과 2005년 북핵 6자회담 9ㆍ19 공동성명이 규정한 포기 대상은 핵 무기와 핵 물질 생산 시설, 핵 프로그램 등이었다.
때문에 먼저 북한을 상대로 비핵화를 지금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라고 종용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결론이다. 가령 ‘북한의 핵 무기ㆍ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기로 북미가 합의하고, 첫 단계로 핵 물질 생산 시설 전부를 폐기하기로 했다’는 식의 합의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비핵화 범위를 핵 무기ㆍ프로그램으로 한정하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 정부 몫이다. 다만 미 본토까지 핵 탄두를 보낼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폐기까지는 불가피하리라는 게 외교가 중론이다.
하노이 회담 당시 미국이 첫 단계 비핵화 조치로 요구한 ‘완전한 동결’(complete freezingㆍ핵 무기 생산 중단)도 합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핵 물질 생산 시설 전체를 폐기한다고 합의해도 이행 단계에서는 영변 핵 시설 뒤에야 나머지 시설의 폐기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북한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연구실장은 “확실한 약속 위반 증거가 나올 경우 비핵화 보상 차원에서 일부 미리 풀어준 대북 경제 제재가 복원된다고 못박는다면, 북한이 거부 중인 전체 핵 목록 신고 없이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한 핵 무기 생산 시설 전체를 효과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로드맵 도출의 관건은 비핵화 단계별 대가로 미국이 제재 완화를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8일 국회에 단계적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남북 경제협력까지 일절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아닌 만큼 단계를 나눠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되 단계들이 유기성을 갖도록 ‘큰 그림’을 그려 보자고 북한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미 워킹(실무)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이동렬 외교부 평화외교기획단장은 이날 주(駐)한 스웨덴 대사관이 개최한 한 세미나에서 “제재 해제나 남북 경협은 비핵화에 있어 상당한 진전이 있어야 가능해질 것”이라면서도 “아직까지 미 정부는 (북한 반응을) ‘기다려보자는 분위기’(wait-and-see mode)”라고 전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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