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4개월 만에 무용론 불거져]
취약계층 포괄 취지에도 소수 보이콧에 핵심의제들 표류
정부ㆍ국회는 민감한 현안던져놓고 ‘시한 내 합의’ 독촉만
청년, 여성, 비정규직, 중소기업, 중견기업, 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을 포함한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자는 포부로 지난해 11월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출범 4개월만에 위기에 직면했다. 문재인 정부의 첫번째 사회적 대화의 결실이 될뻔했던 탄력적 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는 청년, 여성, 비정규직 계층별 대표위원 3명의 보이콧으로 최종합의에 실패했고,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노동법 개선 논의도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서 표류하고 있다.
◇소수자 배려와 의사결정 효율성 딜레마 빠져
지난달19일 경사노위산하 의제별위원회인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에서 기존 3개월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최대 6개월로 연장하는 합의를 이뤘을 때만해도 순항할 것 같던 경사노위는 지난 7일 계층별 대표들이본위원회를 보이콧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이들은미조직 노동자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탄력근로제 개편 논의에 참여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서 본회의 전날 회의 불참을 선언, 잠복됐던 갈등이 표면화한 것.결국 근로자 대표 4명 중 1명(한국노총)만이 본위원회에 참석, 의결 정족수(근로자 또는 사용자 대표 각각 2분의 1 이상) 미달로의제별위원회에서 3개월 간 논의 끝에 도출된 합의는 최종 추인을 못받았다. 경사노위는 고육지책으로 의제별위원회의 합의안만을 국회로 넘겼지만 어렵사리 이룬 노사정 합의는 빛이 바랬다.
대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사회적 대화기구(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노사정위)와 달리 ‘취약계층’을 포괄하겠다는 경사노위의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소수의 보이콧으로도 의제별위원회 합의문 도출과정을 무력화하는 의사결정 체계에 대한 대안 부재가 이런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현재 본위원회 의결 구조대로면 소수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전체 판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의 목소리까지 존중, 합의의 정당성을 높이겠다는 대의명분과 의사결정의 효율성 확보라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경사노위가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문성현 위원장은 19일 “계층별 위원들이 논의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개선방안을 찾겠다”고 의사결정구조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시했지만, 법 개정이라는 문턱을 넘기도 쉽지 않고 이는 무엇보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경사노위의 출범 취지에 역행하는 일이 된다.
구조적 딜레마를 안고 출발했지만, 이런 한계 가운데에서도 운영의 묘를 살려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한 문성현 위원장의 리더십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최종 의사결정 단위인 본위원회에 계층별 대표들을 앉힌 취지는 좋았으나, 합의에 이를 때까지 의제별 위원회 단계에서 이들의 목소리를반영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많다.계층별 대표인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나지현 전국여성노조 위원장,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는 11일 기자회견에서 “탄력근로제 논의 과정에 참여시켜달라는 요구가 거부됐고 합의문이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논의 결과물에 포함시켜달라는 의견마저도 수용되지 못했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노사정위상임위원)는“당장 제도를 손대기보다는 확대된 근로자 대표의 의견을 충분히 취합할 수 있도록 운영 방식을 개선하는 노력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시행착오를 통해 함께 대화하는 노하우를 축적해야 한다는 얘기다.
◇장외엔 쎈 민주노총-장내엔 약한 계층별 대표 구도, 갈등 내포
근본적으로는 노동계의 양축 중 하나인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불참이결국 이 같은 파행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불참 자체로도 사회적 대화의 추진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표성이 부족한 계층별 대표에게도 압박이 됐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부인하지만, 두 차례나 본위원회 참여 의사를 번복하고 불참한 계층별 대표들에게 민주노총과 비정규직 활동가 등 장외세력의 압박이 있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전국 단위 노조인 양대노총의 위원장들과는 달리 청년ㆍ여성ㆍ비정규직 대표(청년유니온, 전국여성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들은 여러 관련 단체 중 하나로, 집단을 대표할 권한도 작아 장외 투쟁 세력의 압박을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계층별 대표 3명은 불참배경을 설명하면서 “양쪽 압력이 너무 거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기업별 노조 중심인 우리나라 양대노총 특성에 기인한 사회적 대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계층별 대표와 같은 다른 목소리가 필요하지만 조직률이 낮은 청년, 여성, 비정규직 분야에서 힘 있는 대표를 선출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사노위는 여러 의제를 놓고 노사가 양보할 부분과 쟁취할 부분을 협상해 나가는 장”이라며 “양대노총 안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고 이해관계가 갈리기 때문에 대표자가 일괄적으로 일부는 손해를 보고 또 다른 일부는 혜택을 받도록 합의하는 일은 당연히 달성하기 어렵다”고 풀이했다.
◇경사노위에 책임 떠넘긴 정부와 국회도 문제
시한을 정해 ‘답정너’ 식으로 경사노위에 합의를 떠넘기는 정부와 국회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노사정이 현안을 털어놓고 논의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데, 시한 내 합의를 종용하는 여건에서는 노사가 절충안을 찾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의 시한을 두고 합의문 내놓으면 그 다음에 국회 입법으로 가자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며 “예를 들어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법개정은 특히 노사 의견 일치를 보기에 굉장히 어려운 사안이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탄력근로제와 ILO핵심협약 비준만이문제가 되는게아니다. 지난해 10월 시작된 경사노위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4월까지 공적연금개혁방안을 합의하기로 했는데 노사ㆍ세대별로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연금구조 개편을 경사노위에서 몇 개월의 시한을 정해놓고 논의하는 일은 무리다. 경사노위 연금개혁특위의 한 위원은“다른나라는 연금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위한 대화를 보통 2년, 3년씩 하는데 6개월만의 결론 도출은 어렵다”며 “좀더 밀도 있는 논의 환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사회적 대화기구는 노사가 자율로 결정한 안을 논의해야 하는데, 상명하달식으로 민감한 현안을 던지고 소방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노사의 신뢰 부족과 사회적 대화에 대한 경험부족이 경사노위의 표류를 가져온 원인으로 지목된다. 문 위원장은 19일“격차나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논의하기에 노사 간 신뢰나 ‘주고 받아야 한다’는 기본 매너 같은 것이 너무 안 돼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런한계에도 불구하고,출범 4개월 만에 경사노위해체론이나 무용론을 언급하는 일은 섣부르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주희교수는 “정부와 국회, 경사노위 간 업무를 구분하고 각자 책임질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속도와 합의 여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경사노위가 충분히 여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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