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의 이름 조차 부르지 말라”
50명의 목숨을 앗아간 ‘크라이스트처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지 나흘째인 20일(현지시간)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캐시미어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이번 테러로 희생된 2명의 10대가 다녔던 학교다. DPA통신에 따르면 아던 총리는 이 자리에서 희생자 급우들에게 “테러범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이번 사건을 곱씹어 생각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테러범과 그의 행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우상화’하려 했던 테러리스트의 광기 어린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란 판단에서다.
아던 총리는 이번 총기난사 테러를 두고 전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차원의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총기 난사 같은 테러가 발생했을 경우 배후 색출과 강력한 보복에 초점을 맞춘 다른 나라의 대처와는 달리 ‘악명’을 얻고자 했던 테러리스트의 목표 자체를 붕괴시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던 총리는 전날 이번 사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의회 특별회의에서도 “그는 테러리스트다. 동시에 범죄자이며 극단주의자”라고 말했다. 이어 “아마도 그는 악명(notoriety)을 얻고 싶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뉴질랜드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름 조차 허용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이 같은 태도는 물론 테러범이 극단주의 세력 속에서 숭앙받는 존재가 될 기회 조차 줘선 안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동시에 테러 청정국이었던 뉴질랜드 입장에선 자칫 이번 사건으로 ‘백인 우월주의의 성지’라는 오명을 써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어떻게 돕길 원하냐”고 물었을 때 아던 총리는 “모든 무슬림에 공감과 사랑을 보여달라”며 우회적이지만 확실한 태도로 거절했다. 이 역시 온갖 테러 위험에 직면해 있는 미국과 이번 사건을 두고 엮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백인우월주의자에 대한 보복과 응징을 스스로 접은 아던 총리는 대신 ‘포용’과 ‘배려’에 집중했다. 사건 발생 직후 “무슬림 이민자들은 뉴질랜드를 집으로 선택했고, 이곳은 그들의 집”이라며 “그들은 우리”라고 강조했다. 여기까진 정치인의 관례적 언어로 취급될 수 있었으나, 이후 그가 보인 행보 하나하나에선 희생자들에 대한 배려가 묻어났다. 16일에는 무슬림 여성들이 착용하는 ‘히잡’을 쓰고 사건 현장을 찾아 희생자 가족을 일일이 안고 함께 슬퍼하고 위로했다.
의회 특별회의에서도 ‘당신에게 평화를’이라는 뜻의 아랍어인 “앗쌀람 알라이쿰”이라고 인사했다. 자칫 ‘정치 행위’로 비칠 수 있지만, 외신들은 진정성에 주목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대응을 바라본 이들은 그의 차분함과 동정심에 환호했다”고 전했다. 무슬림인 사디크 칸 영국 런던 시장은 아던 총리가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고 “포용과 평등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고 썼다. 또 이번 사건으로 쟁점이 될 수 밖에 없는 뉴질랜드의 총기 관련법에 대해서도 사건 직후 곧바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혀 기민하게 대응했다고 많은 외신들이 평가했다.
한편 20일 사건 발생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첫 장례식이 수백 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이날 치러졌다. 첫 장례식이 치러진 희생자는 칼레드 무스타파(44)와 그의 아들 함자(15)였다. 아던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23일 희생자 추모를 위해 뉴질랜드 전체가 2분 간 묵념하는 행사를 열 것”이라고 밝혔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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