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에서 자국 통화인 볼리바르가 사라지고 있다. 연간 200만%에 육박하는 ‘초(超) 인플레이션’으로 볼리바르 가치가 곤두박질 치면서다. 볼리바르가 내어준 자리에 대응하는 방법은 계층마다 엇갈린다. 서민들은 ‘가상화폐’로, 권력자와 부유층은 미국 ‘달러’ 확보에 매달리고 있다.
올 1월 베네수엘라 국회가 발표한 '2018년 물가상승률'은 170만%. 연초 17만원짜리 물건을 살 수 있던 돈의 가치가 연말에는 1원짜리도 못 사게 됐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베네수엘라 서민들은 가상화폐에 눈을 돌리고 있다. 영국 BBC는에 따르면 정상국가에서는 투기자산으로 낙인 찍힌 가상화폐에 의존해 베네수엘라 서민들이 물품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BBC는 폭발적 물가 상승에 더해 정치적 혼돈과 치솟는 범죄율로 이미 300만 명 이상이 나라를 떠난 상황에서, 본국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거나 피난 자금으로 가상화폐를 선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달 에는 대규모 정전으로 거래량이 감소했으나, 지난달에는 매주 약 684만 파운드(약 102억원) 가량이 거래되는 등 가상화폐 거래량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한화로 2,888만원 역대 최고가를 찍었으나, 지금은 400만원대까지 떨어진 비트코인의 ‘변동성’을 생각하면, 차선책으로 가상화폐를 선택한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 짐작할 수 있다. 가상화폐 정보업체인 코인댄스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주간 비트코인 거래량은 수년간 계속 증가, 올 2월 2주차에는 사상 최대인 2,487비트코인(약 108억원)을 기록했다.
월급을 비트코인으로 받는 정보기술(IT) 전문가 리카도 카라스코(29)는 “우리는 볼리바르를 달러나 다른 화폐로 자유롭게 바꿀 수 없다”면서 “세계 금융 시스템에 접근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가상화폐가 일종의 ‘우회로’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자금난에 직면한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도 암호화폐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암호화폐 전문 매체 비트코이니스트에 따르면 이달 초 마두로 정부는 국영 가상화폐 송금 서비스인 ‘페트리아’를 도입, 거래량을 제한하고 15% 수수료를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매체는 이어 페트리아 플랫폼은 신분증이나 생년월일 등 개인정보 제출을 의무화해서 사생활 침해 논란까지 일고 있다며 “과연 사람들이 이 플랫폼을 실제로 사용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가상화폐가 베네수엘라 서민들의 ‘자금 피난처’라면 미국 달러는 부유층의 안전자산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 “현재 베네수엘라에선 달러가 없으면 차 수리도 못하고 아이스크림 조차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며 “누구도 볼리바르를 들고 시장에 가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베네수엘라 사회가 달러에 접근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으로 급속하게 양분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해외에서 달러를 보내 줄 친인척이 있거나, 원래부터 보유 달러가 많은 부유층들은 장기간 정전과 식료품 부족 사태를 손쉽게 극복하고 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학손 데 아빌라는 “해외 거주 가족이 있는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간 경제적 지위가 매 순간 벌어지고 있다”며 “볼리바르로 지급되는 내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건 치즈 한 조각 정도”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조국을 버린 도망자들의 해외 송금에 의존하는 비율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최근 3년간 해외 도피자는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340만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지난해 본국 가족에게 보내 준 외화는 19억달러(2조1,000억원)에 달한다. 유엔은 올해는 그 규모가 4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베네수엘라 경제 컨설턴트인 에두아르도 포튜니는 “미국의 베네수엘라 국영석유기업 제재로 석유 수출 수입이 급감하고 있다”며 “조만간 해외로부터 송금되는 달러가 석유수출액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석유 수출로 전성기를 맞았던 베네수엘라가 미국 달러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종속된 체제로 전락한 것이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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