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 되었을 때 김수영은 스물넷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청년학생기를 보냈던 그에게 아무런 민족적 자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그의 초등학교와 선린상업학교 시절, 그리고 일본 유학 시절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증인이다. 훗날 6ㆍ3한일협정 반대 시위(1963)에 동조하여 박두진ㆍ조지훈ㆍ안수길ㆍ박남수ㆍ박경리 등과 함께 문인들의 한일협정 반대성명서에 서명한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특정 정책을 비판하는 체제내 비판의 일환이었지 반일 민족주의를 나타낸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 더 유별난 것은 그가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투신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직후부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이남의 지식인ㆍ예술가는 좌우 진영 가운데 어느 한 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학계의 경우 좌익은 조선문학가동맹, 우익은 전조선문필가협회나 조선청년문학가협회에 적을 두었다. 김수영은 그 시절을 모더니스트 친구들과 함께 명동에서 우도 좌도 아닌 ‘제3당’인으로 보냈다. 이와 같은 김수영의 의식을 해명하고자 할 때, 하나의 가설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중인 계층이라는 그의 가계다. 김수영의 윗대는 한말과 일제 초를 거치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중인이며, 그가 태어났던 종로구 관철동은 서울의 경제권을 틀어쥔 중인의 거주지다.

양반과 양인 사이에 끼인 중간신분층인 중인은 17세기 초, 잡과(雜科)를 통과한 하급 행정직과 기술 관료직을 중심으로 형성된 계층이다. 이들의 계층 의식이 궁금해서 정옥자의 ‘조선후기 중인문화 연구’(일지사, 2003)와 이동기의 ‘조선후기 중인교육’(영남대학교출판부, 2014)을 특별히 정선해서 읽었다. 상(像)이 썩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중인들이 성리학의 피해자였던 만큼 이념보다는 시무(時務: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와 실용을 중하게 여겼던 것은 분명하다. 또 외교 정세에 민감하고 자기 변신에 뛰어난 것도 중인의 특징이다.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란 김수영은 할아버지로부터 중인의 사고방식을 보고 배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김수영이 혐오했던 자신의 소시민성도 알고 보면 집안에서 물려받은 중인 의식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앞서 김수영의 무이념성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사실이 있다. 그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한 이유는 임화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김수영은 아버지를 무서워하거나 존경한 적이 없고, 어느 글에 “스승 없다.”라고 쓴 만큼,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임화는 역할모범 이상의 ‘상징적 아버지’였다. 가입은 했지만 활동은 변변치 않았던 김수영이 임화를 다시 만난 것은, 인민군과 함께 임화가 서울로 내려왔을 때였다. 이때 김수영은 임화의 당당한 모습을 부러워하면서, 그와 함께 월북하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김수영은 죄책감을 느끼고 북한 의용군(義勇軍)에 자원했다.

반은 자의였고, 반은 강제였던 의용군 지원 경험은 그의 유일한 단편소설이자 자전소설인 ’의용군’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서울을 출발한 의용군 지원자들이 인민군의 감시 아래 평안남북도 경계 부근에 있는 개천(价川)의 북원훈련소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늦게 된 공산주의자인 김수영은 북한 땅 깊숙이 들어가면서부터 사회주의에 실망을 느끼게 된다. 의용군 군복을 벗어던지고 남으로 도주한 김수영은 이후의 삶을 남한 체제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한 번도 남한 체제를 열렬히 찬양하지는 않았다.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은 두 체제 모두에 좌절하고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똑같은 좌절을 했던 김수영은 다른 선택을 했다.

‘의용군’에는 기탄없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터트리는 이름 모를 의용군 지원자가 한 사람 나온다. 김수영은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에 혼자서 마음먹은 대로 불평을 터트리는 그 남자에게 무척이나 매료되었다. “이 시대의 영웅은 스탈린도 김일성도 아니고 가장 불평을 잘 하는 사람이다.” 이념에 실망한 김수영이 이념 대신 선택한 것은 불평이었고, 그가 쏟아낸 불평에는 “세계적인 발언”이 많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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