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띵할 정도의 차가움, 잔을 맞부딪칠 때 통쾌함, 꿀떡꿀떡 넘어갈 때 목젖을 때리는 짜릿함.
맥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매력이다. 그런데 그 이상의 매력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맥덕(맥주 덕후)’이다.
맥덕들은 대량 생산하는 병 맥주뿐 아니라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크래프트 맥주, craft beer)까지 빠짐없이 찾아서 즐긴다. 수제 맥주는 자체 개발한 제조법으로 만들어 독특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맥덕들이 수제 맥주를 먹고 싶을 때 우선 찾는 곳이 있다. 맥주계의 무림고수, 맥림고수를 꿈꾸는 최수영씨의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그가 운영하는 ‘매일맥일(@everydaybeerdairy)’이라는 이름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다양한 맥주의 맛을 기록한 맥주 비록이다. 그를 만나 수제 맥주의 매력을 들어 봤다.
#1 수제 맥주 입문기
Q. 뭐 하는 분인가요?
최수영: 올해 스물 여섯이구요,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어요.
Q. 맥주는 주로 언제 마셔요?
최: 보통 데이트할 때 마시고, 여행가서 많이 마셔요. 집에 사놓고 혼자 먹기도 하구요.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선물로 사가는데 가벼운 설명을 곁들이면 아주 좋아하더군요. 특히 수제 맥주는 단종이 빨라서 신상(신제품)이 나오면 바로 마시러 가요.
Q. 인스타그램에 ‘맥림고수가 되기 위해 정진중’이라고 밝혔던데, 수제 맥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최: 원래 술을 좋아해요. 종류도 가리지 않아요. 3년 전 독일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맥주만 먹다 왔어요. 이제까지 마셨던 천편일률적인 맛이 아니었고 도수도 향도 다양한 게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카스’나 ‘하이트’말고 수제 브랜드가 있는지 궁금했죠. 한국에 돌아와 수제 맥주 파는 곳을 찾다가 서울 망원동에 있는 위트위트(Wit&Wheat)라는 병맥주 전문 판매점(보틀숍, 상점 내 음주 금지)에 가게 됐어요. 사장님이 해 맥주의 유래와 특징, 병에 붙은 상표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것을 들으면서 맥주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수제 맥주에 빠져 들었죠.
Q. 그 사장님이 맥주 선생님이었군요?
최: 맞아요. 맥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취향을 찾아갈 수 있게 해 준 두 분 선생님 중 한 분이죠. 다른 한 분은 ‘맥주탐구생활’을 쓴 김호 작가에요. 일러스트를 곁들여 맥주 입문서로 제격이죠. 가벼워서 술 마실 때 들고 다니며 참고하기 좋아요. 두꺼운 맥주 책도 있었는데 무거워서 팔았어요.(웃음)
Q. 책을 들고 다니며 맥주를 마신 이유가 있나요?
최: 그래야 맛의 특징을 알 수 있어요. ‘이런 맛이 토스티(toasty, 구운 빵 같은 맛)한 것이구나’, ‘이 향을 건자두나 건포도 향이라고 하는구나’ 등등.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어하잖아요. 저도 “아 맛있다” 수준을 넘어서고 싶었어요.
Q. 같이 술 마시면 설명 듣는 재미가 있겠네요.
최: 친구들이 술 마실 때 같이 다니면 좋아해요. 가령 같이 마신 맥주의 뒷맛이 쌉쌀하면 그게 어떤 홉(hop, 물과 맥아와 함께 맥주를 구성하는 3대 요소. 맥주의 향을 결정)에서 오는 맛이고, 그 홉이 과일이거나 풀일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설명을 해주죠.
비슷한 맥락인데 인스타그램에 맥주일기를 쓸 때 상황과 분위기를 함께 제시한 게시물이 많은 호응을 받았어요. 어떤 계절에 마시면 좋은 맥주, 어느 장소와 어울리는 맥주 등을 추천하니 반응이 좋았죠. 위트위트 사장님이 그런 추천을 잘해요.
#2 ‘맥덕’의 조언
Q. 맥주에 대한 기본 정보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최: 맥주 스타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보틀숍에서 하는 수업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해요. 특정 맥주 양조장(브루어리)에 대해 알고 싶으면 ‘브루어리 투어’에 참여하면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꼭 맥주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다른 활동과 엮어서 강좌를 많이 하더군요. 피자 요리교실에서 어울리는 맥주를 맞춰 준다거나 독서, 운동 등 다양한 활동에 맥주를 곁들이는 모임들이 인기 있죠. GKBF, 더 비어위크 서울, 신촌맥주축제 등 맥주 축제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아요. 특히 국내 양조장에서 생산된 로컬 맥주를 두루 맛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에요.
Q. 맥주를 한 잔 마실 때 생각해야 할 게 많네요. 브루어리의 특징부터 맛과 향, 병 디자인까지.
최: 와인은 술 한 잔 놓고 천천히 마시는 문화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죠. 맥주는 그렇지 않다는 통념이 강한데 폭음하지 않고 하나의 문화를 마신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어요.
Q. 그런데 취해도 섬세한 구분이 되나요?
최: 사실 힘들어요. 맥주마다 도수가 들쭉날쭉하고 여러 병을 사서 사람들과 나눠 마시는 일이 잦아서 먹다 보면 엄청 취하죠. 맥주는 와인과 다르게 목 넘김도 중요해 꿀떡꿀떡 마시다 보니 더 그래요. 여러 병을 마시며 기록하면 뒤로 갈수록 내용이 짧아요.(웃음)
Q. 수제 맥주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최: 맥주를 공부하는 것은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좋고 싫음에 묶이게 되는데 편견을 갖지 않는 게 중요하죠. 가령 수제 맥주 종류인 “IPA(인디아 페일 에일)는 너무 써서 안 마실래”라는 말은 “로맨스 영화는 다 싫어”와 비견될 수 있어요. IPA라는 장르 안에 다양한 맛이 있는데 한 번의 경험만으로 단언하는 게 아쉽죠. 실패 경험이 물론 두렵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다 보면 맛의 지평을 넓힐 수 있어요.
분위기에 취하는 것도 중요해요. 맥주를 마시는 장소는 물론이고 색, 향, 상표지 등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즐길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종합예술이죠.
좋아하는 맥주 중에 뽀할라(Põhjala)라는 에스토니아 맥주가 있어요. 그 중에서도 웨에(Öö)라는 맥주가 에스토니아어로 ‘깊은 겨울밤’이라는 뜻이에요. 이 맥주를 마실 때면 ‘맛의 어떤 부분에서 깊은 겨울밤을 느낄 수 있을까’라든가 ‘따뜻한 방에서 먹는 게 좋을까, 좀 추운 상태에서 먹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죠. 맥주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분야에요.
#3 맥주와 기록, 그리고 사람
Q. ‘매일맥일’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은 어떻게 운영하게 됐나요.
최: 잊어먹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것은 사진 매체를 덧붙이기 가장 편리하기 때문이에요. 맛이라는 게 참 복잡한데 취하고 나면 ‘맛있었지’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취하기 전에 맛을 바로 기록해요. 또 사람들과 맛에 대한 감상을 나눈 것을 녹음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서 표현을 공유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주점 두세 군데를 같이 돌아다니는 ‘펍 크롤(pub-crawl)’에 참여하기도 하고 카카오톡의 공개대화방 ‘고독한 맥주방’에서 감상을 나누기도 해요.
Q. 인스타그램 덕을 본 적도 있나요?
최: 게시물이 한두 장 쌓일 때마다 덕을 많이 봤죠. 펍이나 보틀숍에 가면 “인스타그램에서 봤다”는 말을 시작으로 비슷한 취미를 공유하는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미국 뉴욕의 양조장인 브루클린 브루어리를 알리는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Q. 위트위트에서 책에 어울리는 맥주를 추천해주는 ‘책맥’ 페어링 작업도 했다면서요?
최: 원래는 대학 수업시간에 과제로 내기 위해 기획했어요. 취기를 양념 삼아 독서를 해 보자는 취지로 느낌이 비슷한 책과 맥주를 엮었죠. 잔에 따른 모습이 하얀 눈을 떠올리게 하는 ‘슈나이더 탭2’라는 맥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훈연향과 위스키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테넌츠’는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추천했어요. 읽으면서 많이 울었던 ‘쇼코의 미소’는 눈물의 짠맛이 느껴지는 ‘고제 투 헐리우드’와 엮었습니다.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와 맥주 ‘네브카드네자르’는 쌉싸름한 감정이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시리즈가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서 저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Q. 앞으로 맥주 기록을 확대할 생각도 있나요?
최: 재미삼아 영상 기록인 맥주 브이로그를 두어 편 만들었어요. 영상을 잘 찍은 것도 아닌데 반응이 열렬해서 신기했어요. 하지만 본업과 병행하기 힘들어서 더 만들 생각은 없어요. 기록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취미가 아닌 일이 되죠. 무리하지 않고 기록과 인간 관계를 지속하는 게 중요하죠. 취미는 취미로서 남기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4 ‘술 좋아하는 여자’에 대하여
Q. 좋은 점 이야기를 잔뜩 했으니 맥주 마시는 취미의 나쁜 점을 말해보죠.
최: 아무래도 주류가 남초 시장이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대하는 가게들이 있어요. 그래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단 맛의 술, 꽃 향기 나는 술을 추천하는 가게는 피하려고 해요. 성별과 입맛은 별개죠.
더불어 술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몇 년 전만 해도 함부로 취미를 공개하기 힘들 정도로 편견이 강하다고 느꼈어요. “여자치고 술 잘 드시네요”라는 말들이 늘 따라다녔죠.
달달하고 맛있는데 도수가 높은 술을 ‘작업주’라고 명명하는 식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경향이 커요. 심지어 몇 년 전 맥주 이름을 ‘00동 누나’라고 지은 브루어리도 있어요. 이런 점들을 지적하는 것은 업계보다 소비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문화가 조금씩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술 먹는 여자가 특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Q. 맥주 입맛은 어떤가요?.
최: 신맛이 나는 맥주와 도수 높은 맥주를 좋아해요. 매운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럴 수 있는데, 신 맥주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처진 기분이 올라가는 기분이에요.
Q.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추천을 하나 해준다면?
최: 세종 듀퐁(Saison Dupont)이라는 술이 있는데, 벨기에 농부들이 마시던 노동주에요. 쿰쿰한 냄새가 포인트라 봄에 마시기 딱 좋죠. ‘보리마루’라는 서촌의 보틀숍에서 살 수 있어요.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낮에 마시기 적합한 맥주라 추천해요!
장우리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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