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인사 구술 작업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가진 근현대사 구술채록 대담에서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과 대칭되는 말을 꼽으라면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가 있다. 하지만 앞의 말과 달리, 뒤의 말은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회 변화가 급격해 노인의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그나마 영향력 좀 있다는 노인들이 한다는 얘기는 ‘이만큼 먹고살게 된 게 다 누구 덕이냐’는 것이 대부분이어서다.

조선시대 행장(죽은 이의 언행을 기록한 문장)의 전통까지 겹쳐져서일까. 번듯하게 한자리 차지했으면 무조건 훌륭한 사람이고,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며, 그런 자리 하나 못 차지해본 사람은 바보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런 방식으로 내면적 깊이를 제거해버리고 나니, 우리 사회엔 제대로 된 자서전, 평전, 구술 문화가 없다.

[저작권 한국일보] 장신(왼쪽부터)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가 채원국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노인에게 속지 말라

그래서 ‘채현국’의 존재는 소중하다. 1935년생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이하 ‘선생’)은 1945년 8ㆍ15 해방, 1950년 6ㆍ25 전쟁, 1960년 4ㆍ19혁명 같은 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고, 민주화 운동을 후원했고, 학교를 운영 중이다. 그럼에도 ‘내 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건달 할배’라는 별명답게 오히려 젊은이들더러 “늙으면 뻔뻔해지는 비열한 꼰대들에게 절대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요즘도 여전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곤 하는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도 거부했다. 채 선생은 “세대갈등이란 말 자체가 사람을 속이는 말”이라 본다. 그는 “돼먹지 않은 이들이나 세대갈등이라 부르며 수작을 붙이려는 것”이라더니 “그런 사람들은 원래 젊어서도 형편없었는데, 젊은 시절엔 드러내놓질 못하다가 늙으니까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서울대 출신임에도 서울 광화문광장, 서울역 일대에 자주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를 두고서도 “서울대 나와 의사하거나 법대 나온 내 주변 사람들도 앞에 안 나서고 뒤에서 100만원, 200만원씩 후원한다”며 “일제시대 때 공부 잘하는 게 수지 맞는다는 걸 알고 그저 공부만 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 매섭게 쏘아댔다.

◇8ㆍ15 해방이라는 ‘충격’

그런 채 선생은 요즘 구술 작업에 재미를 들였다. 일제시대 황국신민으로 자라난 기억,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해 연극단원으로 활동했던 추억, 아버지 채기엽씨와 연탄공장과 탄광사업을 일으킨 경험 등을 바탕으로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낸다. 주로 문헌자료를 뒤적이던 현대사 연구자들도 그의 생생한 기억에 호기심을 내보였다. 실제 몇몇 학자들은 올해 초부터 채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채 선생은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과 마주했다. 두 번째 자리였다.

채 선생이 파격적 언행을 거듭하는 건 1945년 8ㆍ15 해방이 안긴 충격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이 아니라 ‘해방의 충격’이라 표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채 선생이 태어난 1935년의 세상은 이미 일제 시대였다. 채 선생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라는 게 있다고 했지만 조선과는 무관하다 여겼다. ‘대한’이란 말도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라는 게 들어서고 나서야 그런 단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채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됐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미친 듯 좋아하며 난리가 벌어졌는데, 스스로를 ‘황국신민’이라 생각해온 나로선 ‘나라가 망했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의아해했다”고 말했다.

◇ “생각하며 살자”

세상이 한번에 뒤바뀐 뒤 이제껏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세뇌된 친일파’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깨달음은 그 이후 채 선생에게 세상을 달리 보는 눈, 달리 사는 법을 일러줬다.

그걸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생각하며 살자’다. 해방은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권력자가 훈련시킨 데 따른 ‘반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일제시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말하지 못하면 얻어맞았다. 뜻도 희미한 일본어 군가(軍歌)를 수없이 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 한잔 들어가면 그 노래가 잘도 나온다”고 했다. 생각 없이, 주어진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다가는 어떤 엉터리 같은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채 선생은 “해방 이후,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서울대? 가정 학대의 정점

해방 뒤 상황은 처참했다. 그 전까지 일본어만 썼으니 중ㆍ고등학교 가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선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릴 적 우리말 소설을 즐겨 읽었던 채 선생은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지금도 “서울대가 최악의 학교”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우리말이 낯선 이들은 한문으로 된 시만 읊었다. 전공 수업도 교수가 우리말을 겨우 외워서 가르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해방됐으나 그들은 일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땐 연극반에 심취했다. 배우 이순재와 같은 극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했다.

채 선생에게 서울대란 그저 시험 잘 치는 학생을 뽑는 곳일 뿐이다. 그는 그런 시험 중심 체제를 가학, 그러니까 ‘가학(家學)’이 아니라 ‘가학(家虐)’이라 부른다. 집안의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집안의, 가정의 학대다. 자기만의 독서, 탐구를 통해 스스로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게 아니라 그저 집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직장을 구한다. 채 선생은 이걸 “통치에 방해되는 생각은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방식”이라 부른다. 이런 방식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탄광 부자 … 과감히 접다

채 선생의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준 1960년대 광산 경영에까지 이어졌다. 광산은 원래 아버지 사업이었다. 1952년 연탄공장을 시작한 아버지는 광산주와 계약을 맺고 채굴한 광물 가운데 일부를 수수료로 내는 독립 경영인 ‘덕대’였다. 광산 사업이 잘 풀리지 않자 연극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배우가 되려고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 들어갔던 채 선생이 뛰어들었다. 공격적 경영으로 그야말로 떼부자가 됐다. 당시 소득세 납부 순위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개발 독재시대였지만 광부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무료 진료를 제공했다. 또 흥국탄광은 그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숨던 도피처이자, 해직기자들의 궁한 살림을 돕는 융통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아버지 사업 잠깐 거들어 드리는 게 목적이었지 돈을 크게 벌 생각도 없었고 부자가 되는 게 창피했다”는 이유로 채 사장은 1973년 그간 잘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10년치 퇴직금을 광부들에게 쥐여주는 방식 등으로 모두 정리했다. 채 선생이 그나마 아버지에게 이어받았던 것은 효암학원 이사장(경남 양산 효암고, 개운중)직이다. 이건 아이들을 키우는 거니 할 만하다 생각했다.

◇제대로 된 기억 전승, 그게 어른의 임무

채 선생의 거침없는 입담으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구술 채록은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끝났다. 3시간 가량 이어진 이야기 행군 뒤에도 고령의 선생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채 선생이 구술에 열정적인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기억 전승’에 나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었던 ‘해방의 충격’ 같은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직접 역사를 써야 한다. 채 선생은 도서관 분류법을 펼쳐 보였다. 철학, 종교, 사회ㆍ자연과학, 예술, 언어, 문학, 역사 등. 그는 “각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 시대 경험을 구술하면 광범위한 정보들이 쌓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용비어천가식 구술은 안 된다. 돌직구처럼 묻고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채 선생은 “묻는 사람이 혹시 노인의 체면을 구길까 봐, 질문의 내용이 가혹할까 봐 망설여서는 안 된다”며 “더 엄격한 기록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선생은 노인들에게 기록을 하라고 외쳤다. 대신 이런 조건을 붙였다. “결코 자신의 과거 잘못을 외면하는 합리화는 하지 말 것.”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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