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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한반도 운명은 우리 손으로” 좌우합작 통일 독립국가를 꿈꾸다

입력
2019.03.18 04:40
수정
2019.03.18 10:05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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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여운형의 ‘조선 독립의 당위성 (외)’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1945년 8월 16일 여운형(가운데)이 서울 휘문고 교정에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5년 8월 16일 여운형(가운데)이 서울 휘문고 교정에서 시민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학자 박찬승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이 평전이 쓰인 인물이 여운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운형의 삶과 사상, 정치활동에 대해 그동안 이만규, 여운홍, 이기형, 정병준, 여연구, 강덕상, 이정식이 평전을 펴낸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1947년 여운형이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많은 평전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그가 대단히 문제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지난 100년 우리 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은 인물은 찾기 어렵다. 그는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 또는 친소주의자로, 좌파로부터 기회주의자 또는 친미주의자로 비판받았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던 걸까. 정치학자 이정식은 여운형을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로, 역사학자 정병준은 ‘좌우와 남북의 통일독립국가를 지향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고평(高評)한다.

여운형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광복 이후 해방 공간에선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함께 중도를 대표했다. 대외적으로 냉전체제가 가시화되고 대내적으로 이념대립이 격화됐던 당시 우리 사회에 허용된 중도의 영역은 대체적으로 협소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해 통일독립국가 수립을 추구했던 여운형의 삶과 정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한 오늘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여운형의 삶과 독립운동

해방을 앞둔 1944년 서울 운니동에서 여운형(가운데)이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였던 건국동맹 소속 운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방을 앞둔 1944년 서울 운니동에서 여운형(가운데)이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였던 건국동맹 소속 운동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운형의 생각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저작은 몽양 여운형선생 전집발간위원회가 펴낸 ‘몽양 여운형 전집’(전3권)이다. 여기에 더해 2008년에 나온 ‘조선 독립의 당위성 (등)’ 또한 훌륭한 텍스트다. 이 책은 작가 강준식이 여운형이 남긴 글, 연설, 기자회견 등을 편집한 것이다. 책은 크게 ‘해방 전’과 ‘해방 후’의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여운형은 1886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다. 몽양은 널리 알려진 그의 호였다. 배재학당, 흥화학당, 우무학당을 다녔고, 평양 장로교회연합신학교, 중국 난징 금릉대학에서 공부했다. 1919년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조직했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했다. 이러한 여운형의 활동은 2ㆍ8독립선언과 3ㆍ1운동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는 외무부 차장을 맡았다.

이해 11월 여운형은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의 초청으로 장덕수 등과 함께 도쿄로 가서 일본 고위 관리들과 회담을 가졌다.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가 조선 자치제안을 비판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담대한 용기는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했다. 특히 제국호텔에서 행한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말한다.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해방ㆍ부인해방ㆍ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 우리의 건설 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여운형의 삶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좌우를 넘나드는 활동을 벌였다는 점이다. 1920년대 초 그는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관여했다. 1922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 대회운영 의장단에 선출됐고 개회식에서 연설했다. 당시 레닌을 만나 조선 독립에 대한 방안을 토론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활동 영역은 이념구도를 거침없이 뛰어넘고 아울렀다.

1929년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국내로 압송됐고, 징역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1932년 출감한 그는 1945년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당시 주목할 그의 활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여운형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당당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자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폐간했다.

다른 하나는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 여운형은 일제 패망을 예상하고 조선 광복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건국동맹은 좌우를 넘어선 통합 노선을 지향했다. 농민·노동자·청년·학생 부문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해외 독립군 세력과의 공동 작전을 모색했다.

◇좌우합작을 향하여

여운형(왼쪽부터)과 도산 안창호, 조만식.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가뒀던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한 직후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운형(왼쪽부터)과 도산 안창호, 조만식. 일제 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가뒀던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한 직후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여운형은 곧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런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건국동맹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여운형의 삶은 대단히 극적이었다. 한편으론 이승만, 김구 등과 독립국가 수립을 논의했고, 다른 한편으론 박헌영, 김일성 등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대응 방안을 숙의했다.

이런 상황 아래 여운형이 도달한 결론은 좌우합작이었다. 그의 파트너는 김규식이었다.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과 중도우파 성향의 김규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선 임시정부 수립, 후 신탁 실시’에 있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신탁 통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두 사람은 합의함으로써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사회주의와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했다. 남한 내 모든 좌우 세력이 합작하고, 이러한 합작을 바탕으로 해 남북연합으로 나아가자는 게 이들의 구상이었다.

여운형의 정치활동에 대한 진지한 평가의 하나는 정병준에 의해 이뤄졌다. 정병준은 말한다.

“여운형은 해방 후 한반도의 현실이 미·소 진영의 대립, 남북의 지역대립, 좌우의 이념갈등이라는 세 층위의 갈등구조에 위치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 한반도 운명의 주인공인 한국인이 미·소를 손님으로 대접한 후 내보내야 하며, 좌우가 합작하고 남북이 연합해야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노선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가장 현실적이며 민족적인 노선이었다.”

이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전후 막 구조화되기 시작한 냉전체제가 가하는 구조적 강제를 과소평가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적 관점에서 해방 공간은 구조적 강제에 맞서서 전략적 선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기였다. 역사가 구조적 강제와 전략적 선택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행된다고 볼 때, 좌우합작의 좌절은 작지 않은 아쉬움을 남겼다.

격동의 시대였던 그 시절, 여운형은 수 차례 암살 위험에 처했다. 1947년 서재필 박사 귀국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그의 귀국을 주도했던 여운형은 7월 혜화동로터리에서 피살됨으로써 돌연 이승을 하직했다. 그는 2005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고, 2008년에는 해방 이후 건국 준비 활동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중도의 미래

서구 사회에서 이념구도는 흔히 보수 대 진보, 좌파 대 우파로 구분된다. 중도보수와 중도진보가 존재하지만, 크게 보아 이들은 각기 보수와 진보에 수렴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이념구도에선 중도가 독자적 영역을 이뤄왔다. 그 까닭은 냉전분단체제의 형성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한국전쟁 이후 진보의 정치적 활동은 불허됐고, 이러한 상황 아래 진보 성향 세력은 중도를 표방하면서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다. 여기에 더해, 1990년대 이후 서구 사회 ‘제3의 길’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중도 세력은 독자적 위상을 가지게 됐다. 예를 들어,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는 진보적 성향과 중도적 성향이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현재, 이념구도는 크게 요동치고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엘리트 대 국민’의 균열을 내세운 포퓰리즘이 기성 보수 대 진보의 이념구도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선 보수와 진보의 이념구도가 외려 공고화되고 있다.

정치사회에서 중도는 양날의 칼이다. 한편에선 단순한 절충의 위험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념 대립을 완충하고 통합을 모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로 이점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이 우리 현대사에서 안겨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보수든 진보든 중도의 정치적 상상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실천할 것인지는 우리 정치사회의 미래에 부여된 중대한 과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다음주에는 석주명의 ‘석주명 나비 채집 20년의 회고록’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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