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앱 2년 만에 30만명 돌파… ‘담뱃갑 속 시’ 등 판매형태 다양
짧은 분량, SNS 유통 최적화… 디지털 세대 ‘힙한 상품’으로 소비
#대학생 A씨는 매일 등교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인 ‘시요일’을 열어 ‘오늘의 시’를 읽는다. 에디터가 추천한 3월 11일의 시는 오종문 시인의 ‘그대의 오지’. 꽉 막힌 가슴으로 한 숨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이 들었단다.
#직장인 B씨는 퇴근길 집 앞 편의점에서 박상수 시인의 ‘오늘 같이 있어’가 포함된 시집 패키지를 샀다. 가격은 9,800원, 저가 와인 한 병과 비슷하다. “오늘 밤엔 와인 대신 시집으로 위로 받아야지…”
책을 읽지 않는 시대, 문학이 외면 받는 시대라지만, 시와 시집은 여전히 뜨겁다. 아니, 몇 년 사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13일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지난 해 연간 시집 판매량은 2014년보다 43.1%, 2013년보다는 78% 늘었다. 창비출판사가 2017년 4월 서비스를 시작한 ‘시요일’ 사용자는 무려 30만명. 시를 랜덤으로 추천하는 트위터 계정 ‘시봇’을 구독하는 사람은 약 11만 3,000명이고,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시집’을 달아 올린 게시물은 13일 현재 17만 3,000건에 이른다.
어디에나 시가 있고, 어디서나 시집을 구할 수 있는, ‘시(詩)가 지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시는 읽기도 쓰기도 어렵다는데, 한국인은 왜 이렇게 유난히 시를 사랑하는 것일까.
◇ 앱으로, 인스타로, 시집으로…詩의 르네상스
문단에는 “시집은 불패”라는 말이 있다. 소설은 1,000~3,000부쯤 찍는 초판을 소진하지 못하는 일이 많지만, 시집 초판은 여전히 대부분 팔린다는 것이다. 시집 고정 독자 층이 탄탄해서다. 시 코너가 없는 경우가 많은 외국 서점과 달리, 국내 서점의 명당은 여전히 시집 차지다. 알라딘 집계 결과, 지난해 시 장르로 출간된 책은 6,674종. 2016년 4,380종, 2017년 6,390종에 이어 확연한 상승세다.
‘시집 베스트셀러’가 나오는 것도, 시집 복간본이 인기를 끄는 것도 한국의 독특한 현상이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2015), 박준 시인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7)는 각각 17만권, 10만권 팔렸다. 어느 책이든 약 1만권 넘게 팔리면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출판 환경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의 초판본 복간본은 최근 5년간 시집 판매 순위 5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인터넷서점 yes24의 김도훈 시 담당 MD는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다양하게 출간되는 것이 최근 경향”이라며 “시 어플리케이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시가 활발하게 공유되고, 그게 시집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가 시집에, 시집이 서점에 갇혀 있지 않는 것도 요즘 트렌드다. 시집은 편의점에도 진출했다. 문학동네는 전국 이마트24에서 특별 제작한 한정판 시집 1,650권을 판매했다. 시 독자들은 한정판 ‘굿즈’ 모으듯 시집을 샀다. 시인 지망생이 쓴 시 한 구절을 적은 작은 종이를 담뱃갑 만한 상자에 담은 상품인 1만 4,000원짜리 ‘주머니시’는 최근 크라우드 펀딩으로 499권이 완판됐다.
◇ 인구 대비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
“인구 대비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다.” 문인들끼리 하는 농담이다. 다양한 문인협회 소속 시인부터 대학 문예창작학과 학생, 아마추어 시인 지망생까지, 시를 쓰는 사람이 ‘정말로’ 많다.
언론사 주최 신춘문예에는 매년 시 수 만 편이 쏟아진다. 2019년 각 언론에 응모된 시는 약 5만 편에 이른다. 신춘문예로만 매년 20여명의 시인이 탄생한다. 시인 지망생의 필수 코스로 불리는 ‘시 아카데미’는 늘 호황이다. 2016년 시 수업을 개설한 창비출판사의 ‘창비학당’을 거쳐 간 시인 지망생은 모두 460명. 창비학당 관계자는 “수강생 접수를 시작하면 평균 열흘 이내에 마감되는 바람에 언제나 대기자가 나온다”면서 “문창과 재학생이 현장 시인을 만나기 위해 등록하기도 하지만, 시에 대한 열정으로 난생 처음 시를 써보려고 한다는 수강생도 많다”고 말했다.
시는 더 이상 혼자 쓰고 혼자 읽는 ‘외로운 문학’이 아니다. 적극적인 시 독자들은 시 낭독회를 찾아 다닌다. 여느 문학 독자가 그렇듯, 주로 여성 독자들이다. 지난달 서울 흑석동 북카페 ‘청맥살롱’에서 열린 이현호 시인의 문학콘서트. 20여명의 독자가 모여 이 시인의 시 낭독을 ‘진지하게’ 들었다. 낭독회에서 만난 국어 교사 이재영(34)씨는 “2015년 문학잡지를 읽다 문득 시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 시를 써 보기로 마음 먹었다”며 “시 아카데미에서 시 수업을 들은 뒤 시를 공부하는 모임을 꾸렸고, 낭독회에 자주 참석하며 시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은 사실 배고픈 직업이다. 대한민국에서 ‘돈’과 가장 거리가 먼 직업일지도 모른다. 시집 한 권 당 시인이 받는 인세는 책값의 10%. 한 권에 1,000원이 안 된다. 1만부를 팔아도 소득이 1,000만원에 못 미친다. 문예지 원고료와 강의료를 추가해도 생활비를 대기 어렵다. 시인 지망생들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시심(詩心)과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인 노혜진(42) 시인이 1월 시상식에서 밝힌 당선 소감. “머리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하고 있거나, 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이해타산을 따지며 막아 보려 해도 어쩔 수 없었고 그것이 마음이 진짜 가리키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인기 이유? ‘첨단’과 ‘위로’
시가 이토록 사랑 받는 것은, 그것도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것은 대체 왜일까. 문학동네 시인선 총괄 편집자이자 시인인 김민정 난다 대표의 해석은 이렇다. “사는 게 워낙 힘들고 어려운 시대다. 시에는 정답은 아니라도 딱 내 마음 같은 비유나 구절이 나온다. 그런 구절을 발견하고 SNS에 올리면서 치유 받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얼얼한 따뜻함’이랄까.” 시요일 서비스 담당자이자 시인인 박신규 미디어창비 출판본부장은 “민족적 감수성”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 시 과목이 있었을 정도로 한국인은 시와 노래를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말했다.
중년 이상 세대에게 시는 진부하거나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문학 교과서 속 시들이 오히려 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디지털 세대인 젊은 세대는 시를 ‘힙’한 상품이자 콘텐츠로 소비한다. 박신규 본부장은 “순식간에 소비되고 흘러가는 SNS 콘텐츠에 가장 최적화된 예술 장르가 바로 시”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인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의 설명도 같은 맥락이다. “시는 대체로 짧기 때문에 소설과 달리 전문을 SNS에 인용할 수 있다. 전후 맥락을 설명하지 않아도 문장 하나,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공감과 소통이 가능하다. 때문에 즉각적으로 유통되고 소비될 수 있다.” 한국 소설 시장이 주춤하는 사이, 문학 독자들 사이에서 시가 일종의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 특유의 ‘경쟁 체제’가 새로운 시인을 끊임없이 발굴해 낸다는 점에서 동력을 찾기도 한다.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는 유희경 시인은 “신춘문예 같은 등단 제도를 통해 젊은 시인들이 계속 발굴되고, 이들이 지금의 20, 30대와 공명하는 시들을 계속 써내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 역시 계속 탄생하는 것이 한국 시가 살아남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