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봉곡사에서 열린 성호 강학회 
다산은 성호 이익의 증손자인 이삼환과 함께 성호의 저술 교정 작업에 나섰다. 다산은 직접 사전 답사까지 하며 장소 물색에 나섰고, 제반 비용까지 자신이 대겠다며 이삼환을 설득했다. 열흘 간 성호의 저술 교정작업을 진행했던 온양 봉곡사 무설전 건물. 정민 교수 제공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1795년 10월에 이존창의 검거가 이루어지자, 숨을 돌린 다산은 정조와 채제공을 떠올리며 다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다산은 10월 26일부터 11월 5일까지 열흘 간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의 종손(從孫)인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성호 이익의 ‘가례질서(家禮疾書)’ 교정 작업에 들어갔다. 성호의 저술은 어지러운 초고 상태여서 정돈된 책의 모양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이 정리 작업은 그 추진 과정에 난관이 많았다.

다산은 금정에 도착한 직후 이삼환에게 편지를 써서 성호가 남긴 저술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도명과 처음 격돌한 이튿날인 1795년 8월 24일에는 덕산군 장천리로 이삼환을 직접 찾아갔다. 다산은 이삼환에게 성호의 문집과 경전에 대한 저술이 이제껏 방치되었는데, 이삼환의 춘추가 높아서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삼환이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호사설’은 이미 한 차례 정리해서 어지럽지 않지만, ‘질서(疾書)’ 연작은 뒤죽박죽이어서 내가 죽고 나면 속사정을 알 사람이 없을 걸세.”

9월 3일에 다산은 석문에 사는 진사 신종수와 함께 근처 오서산(烏栖山)에 올랐다. 오서산은 금정역에서 20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다산은 오서산 인근 사찰에 여럿이 모여 성호의 저술을 교정하는 작업을 진행할 심산이었다. 사전 답사를 겸한 유람을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이삼환에게 바로 편지를 썼다.

“용봉사(龍鳳寺)는 황폐하고 누추해서 머물 수가 없겠고, 천정암(天井菴)은 너무 높아 올라가기가 어렵겠습니다. 내원(內院)의 사찰 하나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이곳에서는 20리이고, 계신 곳에서는 60리여서 건강을 회복하신 뒤에 이재위(李載威)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가례질서’와 그 밖에 긴요하게 작업해야 할 책을 가지고 곧장 절로 오십시오. 이후 승려를 보내 제게 알려주시면 어떠실런지요? 종이와 먹, 그리고 양식 마련에 드는 비용은 마땅히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확실히 다산은 서두르고 있었다. 장소 물색에 그치지 않고, 제반 비용까지 자신이 다 댈 테니 하루라도 빨리 작업을 진행하자고 졸랐다. 이삼환은 등이 떠밀려서라도 이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들끓는 주변 여론 

다산의 이 같은 적극적 행보를 두고 당시 이도명을 비롯한 이삼환 주변 남인들의 여론이 요란했다. 제깟 게 뭔데 저리 설쳐대는가. 해도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인데 제가 웬 난리인가. 그 자가 천주교로 얻은 제 잘못을 덮으려고 나서는 일에 우리가 왜 멍석을 깔아 주는가.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다산이 인근의 남인 윤취협(尹就協)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좌명(左明)이란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괴롭게 저를 헐뜯고 비방한다니 진실로 그 낯짝을 한번 보아 특별한 구경거리로 삼고 싶습니다. 듣자니 석문으로 오겠다는 약속이 있다던데, 그를 금정역으로 잠깐 들리게 해도 무방합니다.” 한곡(閑谷)의 이문달(李文達), 즉 이광교(李廣敎)에게 다산이 보낸 두 번째 답장에도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라면, 싫어하는 자가 혹 헐뜯어 비방한다 해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표현이 보인다. 작업의 추진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감해진 이삼환은 비용을 전담하겠다는 다산의 뜻을 꺾고,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려고 절이 아닌 자기 집에서 모이자고 바꿔 제안했다. 다산은 이삼환에게 다시 설득 편지를 썼다.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염려는 십분 이해하지만, 처음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집에서 하겠다고 하니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다. 또 원래 가려 했던 내원의 절은 중들이 모두 옴이 올라 머물 수가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금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예산의 석암사(石巖寺)에서 모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석암사는 지금 온양 봉곡사의 다른 이름이다. 편지 끝에 다산은 “깊이 생각하셔서 용단을 내려 저의 소망에 부응해 주십시오”라고 썼다.

온양 봉곡사 전경. 정민 교수 제공
 봉곡사의 학술 세미나 

곡절 끝에 이삼환의 부름을 받고, 다산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젊은 층들이 참여 의사를 전해왔다. 10월 26일에 다산이 먼저 도착하고, 이튿날 이삼환이 노구를 이끌고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편집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삼환과 다산을 포함해 내포 지역 남인 학자 13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다산은 이후 장장 9일간 계속된 봉곡사의 합숙과 이때 오간 문답과 시문을, 날렵하고 꼼꼼한 필치로 빠짐없이 정리해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란 기록으로 남겼다. 정조가 진작 감탄했던 다산의 속필(速筆)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한편 이때 정리한 책은 ‘가례질서’였다. 가례는 관혼상제에 관한 예법을 다뤘고, 그중에서도 제례(祭禮)가 가장 비중이 컸다.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도라면 결코 이런 작업에 나설 리 없었으므로, ‘가례질서’의 편집에 다산이 주도적으로 나선 것은 모양새가 절묘했다. 다산이 작업의 범례를 정하고, 이삼환의 좌장이 되어 참석자들이 원고를 분량대로 나눠 정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봉곡사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 조촐한 겨울 숲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새벽에는 냇가로 나가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양치하고 세수했다. 종일 작업을 마친 저녁에는 산에 올라 산보했다. 어린 시절 화순 동림사에서 형과 함께 났던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낮 동안은 ‘가례질서’의 난고(亂藁)를 베껴 썼다. 정서를 마친 것은 이삼환이 그 즉시 대조하여 교정했다.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작업 속도가 눈부셨다.

밤중에도 열기가 가시지 않아 밤늦도록 학술토론이 진지하게 벌어졌다. 여러 사람이 각자 궁금한 점을 질문하면 이삼환이 대답했고, 다산은 그 옆에서 그 모든 문답을 속기록으로 남겼다. 문답의 내용은 ‘서암강학기’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루 속의 송곳 

이 문답의 과정에서도 다산은 자루에 든 송곳처럼 날카로운 끝이 비어져 나왔다. 다산의 경전 이해는 성호 우파의 보수적 관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인 오국진(吳國鎭)이 성호의 ‘사칠신편(四七新編)’에 대해 물었다. 이삼환이 성호의 사단칠정론은 퇴계를 바탕으로 했고, 율곡 이이의 기발설(氣發說)은 채택하지 않았다며 퇴계에 기우는 뜻으로 답변했다.

그러자 다산이 이삼환의 대답에 수긍하지 않고 끼어들었다. 예전 정조에게 올린 ‘중용강의’에 대한 답변에서 펼쳤던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개진했다. 핵심은 퇴계와 율곡이 말한 이기(理氣)의 개념이 서로 같지 않은데 이것을 뒤섞어 혼동한 결과 개념 적용에 편차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각자의 이론이 있는 것이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정연한 다산의 논리 앞에 당황한 이삼환은 제대로 된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

열흘이 지나자 어지러운 원고 뭉텅이에 지나지 않았던 ‘가례질서’가 수미가 일관된 완성된 저작으로 변해 있었다. 실로 3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쾌거였다. 이들은 이듬해 다시 모여 나머지 저술을 마저 정리해 ‘성호전서’로 묶기로 다짐하며 헤어졌다. 이 같은 교정과 학술 토론은 다른 참석자들이 일찍이 해본 적 없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들은 모두 성호의 저작을 새롭게 탄생시켰다는 뿌듯함과 자부심에 가득 차서 산을 내려갔다.

다산은 금정역으로 돌아간 뒤 이삼환에게 자신이 품었던 미진한 질문을 목록화해서 두 차례나 질문지를 더 보냈다. 수십 항목에 걸친 질문에 대해 이삼환도 작심하고 꼼꼼한 대답을 적어 보냈다. 이 내용 또한 ‘서암강학기’에 빠짐없이 남아 있다.

 이삼환의 다산 평 

봉곡사에서 열린 열흘간의 성호 학술세미나는 예상 외로 큰 성과를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이삼환은 작업의 과정에서 다산이 보여준 놀라운 추진력과 전체를 장악하고 부분을 놓치지 않는 안목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서암강학기’ 끝에 실린 ‘봉곡교서기(鳳谷校書記)’에서 이삼환은 이렇게 썼다. “성호 선생이 남긴 저술이 많아 미처 탈고하지 못했는데, 문하에서 직접 수학한 분들은 세상을 떠났고, 후배들은 학식이 얕아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내려와 이 책의 수정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아 자신을 재촉하여 이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금정일록’에 실린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삼환은 또 이렇게 썼다. “그대를 전부터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열흘간 함께 지내보니 더더욱 감탄하고 열복하였소. 내가 보니 마음이 밝게 빛나고 시원스러워 한 점의 머뭇대고 구차한 뜻이 없었소. 비록 자신이 잘못하여 실수가 있더라도 반드시 있는 것은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여, 그 잘못과 그 잘못을 고친 것을 남들이 모두 알게 하려 하였소. 이 어찌 지금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겠소? 하지만 풍성(豊城)의 보검은 괴이한 광채가 지나치게 드러나고, 지양(地釀)의 훌륭한 술은 짙은 향기가 먼저 퍼지는 법이오. 매번 송곳 끝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운이 많고, 끝내 함축하는 뜻은 적어서 이것이 백옥의 조그만 흠이 되지 않을 수 없소.”

34세, 젊은 날의 다산이 훤히 보이는 문장이다. 청년 다산은 어디서나 보석처럼 반짝였지만, 생각지 않은 곳에서 예각을 드러냈다. 잠깐 머금었으면 싶은 대목에서도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멈추지 않고 바로 튀어나왔다. 이삼환은 다산에게, 주자가 진량(陳良)에게 준 편지에서 말한 “예로부터 영웅은 전전긍긍하며 깊은 물가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한 가운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는 말을 건네, 함축 공부에 더 힘을 써서 자중 할 것을 충고했다. 이삼환의 다산 평에는 원로다운 혜안이 엿보인다. 그는 그 열흘로 누구보다 다산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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