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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근 칼럼] 균형감 요구되는 영어교육 정책

입력
2019.03.1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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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대표적인 ‘금수저 과목’에 해당

부모 경제력이 실력 향상에 결정적 영향

저소득층 위한 초등 영어 공교육 강화를

조선시대 역관(譯官) 중엔 갑부가 많았다. 17세기에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으로 조선 최고 갑부가 된 변승업이 대표적이다. 지금처럼 국가 간 교역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외국어 능력은 그만큼 강력한 자본이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 외국어의 자본적 가치는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비해 요즘 학생들은 훨씬 뛰어난 영어 실력을 지녔다. 몇 가지 요인이 학생들 영어 실력의 향상을 추동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세계화가 사람들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새롭게 환기시켰다. 이에 따라 어릴 때부터 영어에 매달린 학생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외국에 장기간 체류했거나 영어 실력이 뛰어나면 대학에 좀 더 수월하게 진학할 수 있는 통로도 많이 생겼다. 대학이 국제화에 많은 관심을 쏟은 탓에 영어 강의 비율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캠퍼스에 외국 학생들이 넘쳐나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기회도 크게 늘었다.

가정의 경제적 여건이 아동의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을 과목별로 분석해 보면 상당히 일관된 양상이 나타난다. 경제적 여건은 국어 성취도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수학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단지 집안이 넉넉하다고 해서 국어나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영어 성취도는 경제적 여건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영어는 대표적인 ‘금수저 과목’인 셈이다.

영어가 ‘금수저 과목’일 수밖에 없는 건 금전적 투자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특출하게 잘하는 학생들은 어떤 형태로든 어려서부터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충분히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부모와 함께 외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거나 방학 때마다 어학 연수를 다녀오는 게 대표적 사례다. 고액 영어 유아학원에서 원어민으로부터 영어를 배웠을 수도 있다.

가정의 경제적 여건이 영어 실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면 영어 과목은 계층 간 교육 격차 심화의 묘판이 될 소지가 크다.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유발하고, ‘부유층 따라 하기’를 통해 자녀의 영어 실력을 키워주기 어려운 서민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을 안길 공산도 있다. 따라서 수능에서 영어 과목에 절대평가를 적용하는 건 상당히 타당한 정책이라 하겠다.

하지만 선행학습을 막기 위해 초등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교육을 금지하는 건 재고할 필요가 있다. 득보다 실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고액 사교육이나 외국 체류 경험을 제공하는 게 가능한 이들에겐 공교육이 영어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도 별로 문제가 없다. 어차피 이들에게 공교육은 자녀의 영어 실력을 키우는 핵심 통로가 아니다. 이들로선 공교육에서 영어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부실할수록 영어에서 확고한 우위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공교육이 아니면 자녀가 변변한 영어 학습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 계층에서 발생한다. 자녀가 영원히 영어 낙오자로 남게 될 개연성이 크다. 경제적 여력은 있지만 자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사교육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걸 피하고 싶은 학부모도 사정이 딱하긴 마찬가지다. 하릴없이 사교육을 찾게 될 가능성이 크다. 허울뿐인 선행학습 금지에 교조적으로 집착할 경우 계층 간 교육 격차 심화와 추가적 사교육 수요 발생이 불가피한 것이다. 초등 영어 교육 정책에 균형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배경이다. 어떤 경우에도 명분과 당위에 매몰돼 사안의 본질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초등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교육을 재개한다면 영어 수업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저소득층 아동이 출발선에서의 불평등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 실력 격차는 필연적으로 소득과 사회적 지위의 격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소득층 아동이 공교육을 통해 기본적 영어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건 교육복지 차원에서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업이라 하겠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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