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1일(현지시간) “북한 비핵화를 점진적으로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포스트 하노이 대북 협상 방향이 일괄타결의 빅딜임을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하노이 회담 전 동시ㆍ병행적 접근을 언급했던 만큼 입장 선회 배경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비건 대표가 상정한 ‘병행’(parallel)과 북한의 ‘단계’(step by step)는 핵심 쟁점인 비핵화와 상응조치에서 동상이몽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건 대표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전인 지난 1월 말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미국은 북한 측에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한 약속을 동시ㆍ병행적으로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고, 이는 북한이 주장해온 동시ㆍ단계적 접근법을 채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당시 미국 내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비건 대표의 발언에 대해 “그간 미국 정부가 고수해온 ‘선 비핵화 원칙’을 사실상 폐기한 것”(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이란 비난까지 나왔다.
이날 핵정책 콘퍼런스 좌담회에서 진행자가 스탠퍼드대 강연을 거론하며 던진 질문도 정책기조의 변화 여부였다. 이에 비건 대표는 북미 정상이 6ㆍ12 싱가포르 회담에서 합의한 ▦북미관계 개선 ▦평화체제 구축 ▦비핵화 등을 두고 “이들은 병행해서 진행되지만 모든 것이 합의될 때까지는 어떤 것도 합의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미관계 개선이나 평화체제 구축 논의가 진전됐더라도 비핵화 논의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다른 부분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얘기다.
이는 비건 대표가 언급한 병행은 싱가포르 선언문의 4개항을 함께 진전시킨다는 뜻으로 북한의 부분적 비핵화 조치에 맞춰 미국이 상응조치로 제재 완화가 아니라 북미관계 개선 항목에 해당하는 ‘연락사무소 개설’과 평화체제 구축 항목의 ‘종전선언’을 준비했다는 함의가 담긴 것이다. 실제 비건 대표는 스탠퍼드대 강연 당시 질의ㆍ응답 과정에서 “당신이 모든 것을 할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며 상응조치를 시사하면서도 “비핵화가 완료될 때까지 제재를 해제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맞다”며 제재 문제에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북한이 요구한 ‘행동 대 행동’ 방식의 단계적 접근에 담긴 뜻은 부분적 비핵화 조치에 대한 부분적 제재 해제였다. 특히 북한은 하노이 실무회담에서부터 영변 핵시설 폐기의 대가로 사실상 핵심 경제제재의 전면 해제를 요구했고, 제재 완화에 완강한 미국 입장에선 병행이 사실상 무의미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 사이에선 병행 원칙으로 종전선언을 내주는 것을 두고도 북한의 단계적 접근법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거셌다.
이 때문에 미 정부 고위당국자는 하노이 회담 의제 실무협상 과정에서 병행 조치에 대해 “단계적 프로세스를 말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매우 신속하고 큼직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병행 원칙에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비건 대표가 꺼내 들었던 병행 원칙은 하노이 회담에서 북미가 타협점을 찾을 것이란 기대만 부풀렸다가 노딜 회담의 충격파만 키운 결과가 됐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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