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대자보 거리’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학생회 내지는 학생 사회의 위기를 입에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위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위기는 이미 우리의 입에 들어찼고 우리의 눈앞에 가득하다. 학생 사회의 붕괴는 우리의 현실이다.”
2019학년도 1학기 첫 주인 6일 오전, 서울 성북구 고려대 정경대 후문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설레는 새 학기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학생 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쓸쓸한 문장이 벽에 내붙었다. 하지만 휴대폰에 내리꽂힌 시선과 수업에 늦지 않으려 달리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해일이 지나간 후에’라는 제목의 이 대자보를 쓴 이들은 총학생회 산하 특별자치기구 ‘고려대 생활도서관(생도)’의 구성원들이다. 생도는 정경대 후문에 붙는 대자보와 각 학생회의 학생자치자료를 수집해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한다. 작성에 참여한 송호영(24)씨는 “캠퍼스에서 아무도 선거에 출마하려 하지 않아 학과와 같은 작은 단위 학생회에서도 비상대책위원회가 겨우 꾸려진 상황”이라며 “여전히 학생자치의 존립을 위해 누군가 묵묵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썼다”고 말했다.
대학생 억압이 극에 치달았던 1980년대부터 제대로 된 게시판이 없었던 고대생들은 정경대 후문과 이어진 통로에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0년 3월 10일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업체가 되었다”며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로 자퇴를 선언해 파문을 일으켰던 ‘김예슬 선언’도 이곳에 붙었다. 2013년 12월 전국적 대자보 저항 운동으로 확산한 주현우(당시 고려대 경영학과 재학)씨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의 시작도 이곳이었다. 하지만 2019년 3월, 이 벽의 대자보는 ‘학생사회의 붕괴’를 말한다.
비관이 잠식한 학생 사회 속에서 대자보는 희망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류 멸망 시나리오에 대비해 온갖 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국제종자저장고’처럼 묵묵하게 학생 자치의 씨앗을 품고 있겠노라 말한다. 대자보의 일부 문장을 옮겨 적는다.
“소비자주의의 해일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후에 우리가 어깨를 맞댔던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해일이 지나간 후, 우리가 그간 쌓아온 학생자치가 무너졌을 때를 위해 대비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이야기했으며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비록 당장의 해일을 막을 수 없을지 몰라도, 언젠가 이를 넘어설 물결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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