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세안 무기시장 큰손 필리핀
한진중 수비크조선소, 中과의 전략적 요충지… 인수 총력전
신형 킬로급 러 잠수함 도입도 추진… 배치 땐 중국에 부담
최근 아세안 지역 방산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한 나라를 꼽으라면 필리핀이 도드라진다. 지난해 러시아산 디젤 잠수함 2척을 도입하기로 한 데 이어 최근에는 해군 함정 건조 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나라 한진중공업이 자금난으로 손을 놓은 수비크 조선소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필리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7년 기준 2,976달러로 세계 129위다. 병력 규모도 작다. 육군이 8만명, 해군과 공군은 모두 합쳐 4만명을 넘지 못한다. 미국의 군사력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는 필리핀의 군사력을 세계 137개국 가운데 63위로 평가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서 여전히 ‘약체’인 필리핀이 돌연 러시아제 잠수함과 대형 조선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필리핀 “수비크조선소, 중국만은 안 돼”
지난 1월 세계 조선업계의 이목을 끈 깜짝 발표가 필리핀에서 나왔다. 한국의 한진중공업이 경영난 때문에 지난해 시장에 내놓은 ‘수비크 조선소’를 필리핀 정부가 인수하겠다는 것.
올 초 필리핀 일간지 필리핀스타에 따르면 필리핀 군 당국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수비크 조선소를 정부가 인수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지난 4일 일본의 닛케이아시안리뷰는 로버트 엠페드라드 필리핀 해군 중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필리핀 해군이 수비크 조선소 지분을 직접 보유하기를 원한다”고도 밝혔다. 실제 한진중공업은 6일 "6,874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국내 8개 채권단과 필리핀 은행 4곳에 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수비크 조선소에 대한 필리핀의 권리행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필리핀이 전광석화처럼 수비크 조선소를 낚아챈 배경에는 남중국해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당초 수비크 조선소가 매물로 나왔을 때 유력 매수자로 거론됐던 것은 중국 조선업체였다. 이러자 필리핀 정치권에선 “중국에게만은 빼앗겨선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수비크 조선소의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수비크 조선소는 중국이 남중국해에 설정한 제1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말레이시아)에서 제2도련선(사이판~괌~뉴질랜드)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놓여 있다. 만약 중국이 조선소를 인수, 군사기지화 할 경우 필리핀 입장에선 중국 함선들이 자국 해역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모습을 목도해야 할 판이었다. 산토니오 트리아네스 4세 의원은 “(수비크 조선소가) 중국 손에 들어갈 경우 필리핀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필리핀이 직접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델핀 로렌자나 국방부 장관도 “수비크 조선소 인수가 필리핀의 해군 함정을 자체적으로 건조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두테르테 대통령을 직접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필리핀은 해군력 증강에 수비크 조선소를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필리핀의 자체적인 군함 건조 능력은 매우 떨어질 뿐 아니라 현재 운용 중인 해군함정 대다수가 노후화된 상태다. 1994년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 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의 미스치프 암초에 이어 2012년 스카버러(중국명 황옌다오) 암초를 각각 중국에게 빼앗겼을 때도 필리핀 해군은 이렇다 할 대응 기동조차 하지 못하고 중국을 비난하는 외교적 성명만 남발했다.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있는 이들 암초에는 현재 활주로와 미사일 기지, 레이더 돔(dome)이 들어서며 남중국해의 중국군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국에 ‘눈 뜨고 코 베인’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필리핀은 5년 단위 3단계 군 현대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반군 문제 등 내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무기 획득이 중심이 된 1단계(2013~2017년) 사업을 거쳐 현재 진행 중인 2단계(2018~2022년) 사업은 전투기와 전투함 등 주로 외부 위협 방어에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2단계 사업에는 ‘잠수함 도입’ 계획도 포함돼 있다.
러시아제 ‘바다의 블랙홀’ 도입 준비
필리핀 현지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로렌자나 국방장관은 “러시아가 우리에게 킬로급 디젤 잠수함 2대를 팔 것”이라고 밝혔다. 아세안 지역에서 잠수함을 보유한 나라는 싱가포르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정도다. 필리핀이 러시아제 킬로급 잠수함을 보유하게 될 경우 아세안 역내 국가 중 몇 안 되는 잠수함 보유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해양 군비 가운데 잠수함의 의미는 남다르다. ‘규모의 전쟁’ 양상을 띠는 현대전에서도 ‘소군’이 ‘대군’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무기체계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이 어떤 잠수함을 들여올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베트남이 2009년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최첨단형 킬로급 잠수함(636MV)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잠수함은 배수량 2,400t 규모로 52명의 승조원이 탑승하는 등 소형 잠수함에 가깝다. 그러나 소음이 적기로 유명한 킬로급 잠수함 중에서도 가장 조용해 미국 해군은 이 잠수함에 ‘바다의 블랙홀’이란 별명을 붙였다.
최대 작전 반경은 6,000∼7,500㎞이며, 533mm 어뢰발사관 6문을 갖춰, 18발의 어뢰를 발사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이 잠수함을 남중국해 방위 거점인 깜라인에 실전 배치한 데 이어 필리핀까지 가세할 경우 중국 함대라 할지라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거란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국 국방기술품질원이 발간한 ‘2018 세계방산 시장 연감’에 따르면 2015년 32억6,100만달러였던 필리핀 국방비는 2022년엔 52억2,400만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같은 기간 해군 예산은 4억8,500만달러에서 8억7,000만달러로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나, 전체 국방비 증가율을 크게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필리핀의 이 같은 군사력 증강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내세운 ‘반미 친중(反美親中)’ 외교노선과 얼핏 모순적인 것으로 비쳐진다. 친중노선은 미국을 등진 필리핀이 해외 투자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당했던 수모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는 정서 역시 필리핀에 짙게 깔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필리핀의 군사력 강화 노력은 중국에 또다시 같은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한 ‘와신상담’으로 읽힌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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