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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접점의 상실, 이성의 위기

입력
2019.03.07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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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은 접점에서 생겨난다. 접점은 단순히 맞닿아 있는 게 아니다. 상이한 물질들 간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 새로운 물질이 창출되고, 접점에서 생겨나는 스파크가 더 큰 변화를 촉발하기도 한다. 화학적 변화 없는 접촉은 물리적 충돌일 뿐이다. 접점은 단순 절충이 아니다. 접점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변화의 시작이다. 접점이 쌓여야 미래로의 이동이 가능하고, 발전이 가능하다.

접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경쟁력이다. 성공하는 개인들은 자신이 가진 역량과 원하는 방향과의 접점을 만들어낼 줄 안다. 기업이나 사회, 국가도 접점을 통한 변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판으로 이행해 가야 성장한다. 접점을 많이 갖는다는 것은 변화와 성장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부정(否定)이다. 현재와 역사에 대한 부정, 그리고 상대에 대한 부정에서 정체성을 찾고 있다. 부정의 정치는 급속도로 진영 프레임에 의거한 대립 구도를 만들고, 블랙홀처럼 의견과 사고를 빨아들인다. 답은 정해져 있고, 상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것이 절대선이 된다. 프레임들 사이에서 서로를 부정하고 리셋 스위치를 누르는 과정에서, 현실의 실체는 뭉텅이로 잘라져 나간다. 흑백 사회에서 회색의 전문성이 설 공간은 사라진다. 프레임의 구도에서 합리성과 다양성은 배부른 개념이고, 실용은 변절의 다른 표현이다. 프레임 사이의 거대 공백은 일부 관료들과 정체불명 외국 자본의 몫이 되기 일쑤다. 그걸 보면서도 서로 상대방 책임을 논하는 것에 더 급급하다.

프레임은 끊임없이 자기 논리를 개발한다. 정교해진 논리는 웬만한 이념적 도전을 손쉽게 제압한다. 프레임 논리는 강하고 화려하다. 거칠고 원색적일수록 프레임 안에선 순수해지고, SNS에는 수많은 ‘좋아요’와 친구 요청이 들어온다. 프레임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외롭지 않다. 살아남고 힘을 얻기 위해 많은 이들이 종종 옳다고 생각하는 중간지대를 떠나 프레임 안으로 스스로 모여든다. 집단 분노의 힘은 막강하다.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싶은 것은 모든 정치인들의 바램이다. 끝없이 분노의 대상이 떠오르고, 그것은 프레임의 불길이 된다. 사람들은 열광하고, 환호한다. 증오를 바탕으로 큰 집단은, 또 다른 증오로 사라진다는 역사의 교훈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감성은 그렇게 이성에게 승리했다.

반면 접점은 화려하지 않다. 아주 작게, 순간적으로 화학 변화와 스파크가 일어나기도 한다. 대부분 접점들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접점의 삶은 외롭고, 위태롭고, 그 위에 서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정치적 중도세력과 제3의 길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접점에서 충분한 화학작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좁은 접촉면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안정된 토대가 생길 때까지 접점을 재생산하며 버티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미래로의 변화는 접점 없인 이루어지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접점을 상실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접점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경제지표의 하락보다 사라지는 접점과 고갈되는 이성 속에서 빠르게 추락하는 변화의 동력을 더 경계해야 한다. 접점을 만드는 것은 포용과 실용, 소통이다. 더 많은 이들의 접점 만들기 시도가 늘어나야 한다. 프레임의 집중 포화와 외로움을 견뎌낼, 그걸 응원해 줄 이들이 모여야 한다.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이제는 상이한 의견 사이의 접점을 만드는 법을 얘기해야 한다. 맞닿음이 충돌이 아니라 화학적 변화와 스파크를 만드는 접점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프레임의 승리를 안겨줄 귀인을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접점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쳐 줄 사람들을 불러내야 한다. 그것을 기성 정치에만 맡겨 놓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재승 고려대 장 모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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