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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흰 종이에 상처를 올려놓다

입력
2019.03.07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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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가까운 야산에서 벌목해 놓은 나무를 손수레로 실어다 말려 겨우내 땔감으로 사용했다. 베어놓은 지 여러 해 된 나무인지라 도끼로 쪼개 보면 나무의 속이 썩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오늘 아침에 쪼갠 나무도 속이 썩어 있었고, 썩은 나무속에 숱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그냥 썩은 나무가 아니라 구멍들 속에 굼벵이와 개미들이 꼬물꼬물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썩은 나무 속 숱한 구멍들이 생명체들의 보금자리였던 셈.

얼마나 미안하던지! 나는 나무 구멍 속에서 나온 굼벵이들과 개미들을 모아다 뒤란의 마른 풀덤불 속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그 미안함을 달래기 위해 서재로 들어가 ‘거기가 꽃자리였을 것’이란 시를 한 편 끄적였다. 비록 썩은 나무지만, 나무 구멍 속이 그 생명체들에겐 꽃자리이고, 부득이한 구멍수였을 거라는 것.

이것이 평생 넝마살림을 꾸려온 내 삶의 방식이다. 돌아보면 시인으로 데뷔하던 젊은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강원도 오지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간신히 목에 풀칠을 하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끊임없이 ‘시작’(詩作)에 몰두하는 것. 당시 나는 시가 삶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는 또렷한 자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시 쓰기를 통해 그 후미진 골짜기에서 겪는 삶의 고통과 아픔을 스스로 치유했던 것이다.

“홀로 남몰래 앓는 신음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결국 심장을 산산조각 내는 법이니 슬픔에 언어를 주라!”는 시인 셰익스피어의 충고를 듣게 된 건 훨씬 후의 일. 어쩌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 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날이면 은연중 원고지에 시를 긁적이곤 했다. 그냥 두면 크게 덧날 내 안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현란한 수식도 생략한 채, 쌍시옷 섞인 육두문자 마다하지 않고 솟구치는 분노와 슬픔을 시로 표현하고 나면, 상처 입은 소나무가 제 몸의 흰 송진을 흘려 스스로를 치료하듯 내 욱신거리는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날선 언어들이 나를 아물게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랬다. 참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때로 내가 나를 밟고 가듯이 나를 괴롭게 한 상처의 아픔을 내 몸을 살리는 영약 삼아 앞으로 나아가곤 했던 것. 삶의 신비이고 언어가 지닌 신비이다. 언어는 치유의 힘을 내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사는 집에 ‘불편당’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편리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불편’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자각과, 어차피 불편한 삶을 면할 수 없는 처지라 불편을 긍정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당호를 붙이고 사니 불편도 불편으로 느껴지지 않고 불편도 견딜 만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어떤 작가가 ‘이야기 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고 했던가. 나는 낡은 한옥 기둥에 한글로 주련을 달면서 ‘불편도 불행도 즐기자!’고 써서 붙였다. 그래서 그럴까. 아침에 눈 뜨고 마당으로 나가면 주련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날그날 닥쳐오는 불편, 불행도 기꺼이 맞이하게 되더라.

그렇지만 흰 종이 위에 상처를 올려놓는 시 쓰기가 만병통치는 아니다. 때론 그냥 저 벙어리 침묵 속으로 고요히 잠수하는 것이 내 상처를 아물게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던가. 시의 언어가 갖는 치유기능은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발명해낸 위대한 힘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한 이 언어의 힘을 잘 활용해야 한다. 우리 안의 상처로 인해 아플 때는 아프다고 말해보자.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시의 언어로도 종이에 적어보자.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그냥 자기 아픔을 노래해보자. 그러다 보면 아픈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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